<아메리칸 뷰티>를 보고
회사를 다니고서 좋은 점은 돈이다. 돈 덕분에 하루하루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 나쁜 점은 보기 싫은 인간들을 매일 마주치면서도, 그들에게 밉상이 되지 않기 위해 미소를 항상 띄고 다녀야 한다. 보기 싫은 놈들도 '팀워크'라는 이유로,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누가 시키지는 않는다. 그저 현실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편하니' 그렇게 할 뿐이다.) '타인'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마주할 때, 일상은 비루한 색으로 바래지고 만다. 아, ㅈ같지만 때려칠 수도 없고, 이직이나 다른 직장을 생각하자니 돌파해야 할 과제들의 무게가 만만치도 않아보인다. 이런 상황을 버티고 버티다 보면, 나 역시도 내가 욕하는 그들과 닮아가리라. 그렇게 학습된 무기력을 나는 또 누군가에게 학습시킬 것이고, 그 학습 받은 무기력을 누군가는 또 누군가에게 전파시키며... 아 상상만 해도 끔찍한 세상이다. 아아..!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 분)도 마찬가지다. 직장은 본인은 자르려는데 급급하고, 아내에게는 무능한 가장 취급을 받으며, 딸에게는 자기 친구에게 집적대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무력하기만 하던 그가 삶의 의지를 되찾기 시작한 건, 딸 제인의 친구에게 호기심을 느낀 이후부터다. 그는 잊었던 자신도 욕구와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과할 정도로 당당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그를 쫓아내려고 퇴직을 종용할 때도, 회사 사장의 비리를 덮어주는 조건으로 1년치 연봉과 퇴직금을 달라며 협박까지 성공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아내가 원하는 남편, 딸이 원하는 아빠의 삶이었다면, 자기 자신이 원하는대로 산다. 이런 삶의 방식을 바라보는 제3자의 눈에는 그가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지지만, 본인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책임감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자신의 그래봤자 별 볼 일 없는 욕망(맥주 먹기, 자동차 사기 등)을 채워갈 수 있기에 행복하기만 하다. 그는 영화의 끝자락에 죽으면서도 웃으면서 죽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며 살거나, 욕망을 억제하고 숨기며 힘겹게 사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특히 옆집의 해병대 대령(크리스 쿠퍼 분)은 동성애자지만,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 규율과 규칙을 만들어낸다.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로 로빈 윌리암스의 유작이 된 <블러바드>도 있다.) 그의 규율과 규칙에 짓눌린 아내는 말도 멍하게 살아가고, 아들 리키(웨스 벤틀리 분)도 반발심에 앞에서는 대령을 따르는 척 하지만, 뒤로는 대마초를 판매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불행의 근원은 결국 대령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귀결된다. 군대라는 억압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의 생존전략은 욕망의 억압일 뿐이었을테니, 그는 평생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살아왔을 게다. 그것을 탓하기라도 하듯 아내와 아들에게 권위적인 가장이 되어버린 것인데, 그가 자기 스스로를 당당하게 여기며 살았더라면 이 영화의 결말의 비극이 아닐 수도 있지 않았을까.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군대라는 공간적 바탕이 그것이 전혀 가능해보이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존나 당당하게 살기. 말로 적기는 쉽지만 일상에서 추구하며 살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비위를 끊임없이 거스르고, 때때로 나를 작게 만드는 인간들에게는 그들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음을 일러주는 노력을 지속해야 하는데, 이게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란 말인가. 나 같은 남 눈치 많이 보는 인간에게는 택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렇게 하지 않다가는 <아메리칸 뷰티>의 영화 초반의 레스터 번햄처럼 무기력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영화 말미의 레스터 번햄처럼, 어떤 상황에도 당당하고, 삶의 아름다운 것들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일상을 비루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엔딩 크레딧과 함께 비틀즈의 <Because>가 흘러나오기 전, 그의 나레이션은 지나치게 달관적이라 거리감이 느껴지긴 하다만, 꽤 의미심장하다.
"죽음에 직면하면 살아왔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일순간에 끝나는 장면들이 아니다. 영원의 시간처럼 오랫동안 눈 앞에 머문다. 내겐 이런 것들이 스쳐간다. 보이스카웃 때 잔디에 누워 바라보았던 별똥별. 집 앞 도로에 늘어선 노란 빛깔의 단풍잎. 메마른 종이결 같던 할머니의 손과 살결. 사촌 토니의 신형 화이어버드를 처음 구경했던 순간.. 그리고 제인, 나의 공주. 그리고 캐롤린.. 살다보면 화나는 일도 많지만, 분노를 품어선 안된다. 세상엔 아름다움이 넘치니깐. 드디어 그 아름다움에 눈뜨는 순간, 가슴이 벅찰 때가 있다. 터질 듯이 부푼 풍선처럼.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 희열이 몸 안에 빗물처럼 흘러 오직 감사의 마음만이 생긴다. 소박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해.. 무슨 뜻인지 좀 어려운가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언젠가는 알게 될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