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2일, 내 아이가 태어났다. 이 녀석은 나와 내 와이프가 결혼을 생각하기도 전에 덜컥 생겨서, 우리를 결혼까지 시킨 후에 태어난 녀석이다. 아이가 태어나니 여러가지 감회가 겹치는 탓에 느낌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강렬한 감각은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생긴 느낌'이다. 이 녀석이 태어난 날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이었다. 나는 벚꽃을 바라보며 '이 꽃은 언제 피어나는 꽃이고, 색깔은 어떻고, 엄마랑 아빠랑은 어쩌구저쩌구'를 아이에게 설명하듯 속으로 읊조렸는데, 무의식 중에 아이에게 벚꽃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연히 메모를 뒤지다 이성복 시인의 시도 한 편 발견했는데, 이곳에도 나와 비슷한 소회가 적혀 있다.
"... 그대가 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그대의 창은 하나둘 늘어난다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을지 모른다 ..."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18> 중
멋진 말이다. 나는 나의 감각과 생각만 가지고 살아갈 뿐이지만, 아이가 생기니 '본능적으로' 아이의 감각과 생각을 고려하게 된다. (심지어 아직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 녀석이 바라볼 벚꽃의 풍경, 엄마의 얼굴, 나의 웃긴 표정 등이 녀석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게 된다. 이제 아이가 말을 하고, 생각을 하게 될 때는, 나의 말, 나의 행동 하나하나도 주의 깊게 해야겠지. (아이는 아빠가 스킨 바르는 습관까지 따라하고, 엄마가 청소기 돌리는 모습까지 따라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 인스타에서 목격했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들을 한 번쯤 생각해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7살 어린 막내동생을 어렸을 적부터 바라봤기에, 아이를 키우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도 사람이고, 타인이다. 녀석이 자지러지게 울어버리면 나는 이유도 알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자라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삶의 과정을 (조금 더 세련되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밟겠지만, 녀석은 녀석만의 방식으로 제 갈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내가 어떤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싶다 한들, 녀석이 길잡이를 원치 않는다면 나의 말을 그저 그런 잔소리에 불과하다. 언제나 '내 아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으로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살다보면 아이에게 열받는 순간이 무척이나 많겠지만, 내 아이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태도를 버려서는 안 된다. 녀석이 나에게 또 하나의 창이 되듯이, 나도 녀석에게 더 크고 멋진 창이 될 수 있도록, 아주 잔잔한 자세로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