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쁘지만은 않다
나는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린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백일을 앞두고 있다. 2.6kg의 작은 아기가 어느덧 6kg에 육박하는 녀석이 됐으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녀석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와 아내는 혼전임신으로 결혼했지만, 나는 결혼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저 때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라는 생각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돈을 모으지 않았고(실제로 둘이 모아놓은 돈은 천 만원도 되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학자금대출 700만원이 남아있는 상태였다(심지어 월급에서 매달 60만원씩 공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혼했다.
그야말로 '혼전임신'이 아니었으면 누구도 결혼이 성사되리라 생각할 수 없는 조건 아닌가. 그럼에도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계산이 우리의 관계를 지배했다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아주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관계라는 판단 하에 관계를 접어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나는 이 여자를 돈으로 보지 않았고, 와이프도 나를 돈으로 보지 않았다. 자본주의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인간관을 우리는 혼전임신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결혼해서 우리는 서촌의 13평짜리 86년에 지어진 빌라에 신혼집을 얻었다. 정확히는 내가 혼자 살던 집에 와이프가 들어왔다. 혼자 살 때는 넓은 투룸이었는데, 둘이 사니 아주 좁은 투룸이 됐다. 우리는 '남들이 말하는 쪽방 신혼집이 실제로 있다면 이런 집이겠지'하며 으스대며 그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결혼이었다면 신혼집은 어디 구했니, 서울이니 수도권이니, 자가니 전세니 따져물었을 테지만,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우리에게는 '갑자기 결혼했으니 눈 붙일 공간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몇몇 사람들은 내가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날 깨달았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의 삶에 관심 없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라도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는 것이 신경 쓰이는 분들에게 감히 한 마디 하자면, 남들이 수근덕댈까봐 지레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밝히시길. 어차피 당신이 신경 쓰는 그 사람들은 당신의 결혼생활에 별 관심조차 없고, 조그만 시간이 지나면 당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잊을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