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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자,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by 필호

하정우는 매력적인 배우다.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 걷고, 걷고, 걷는다. 하루에 통상 3만보를 걷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6,000보를 넘기기도 힘든 게 걸음인데, 거의 평범한 사람보다 5배 정도는 더 걷는다. 출근할 때, 퇴근할 때도 걷고, 일정이 없을 때도 걷는다. 걸으면 몸은 활동을 시작한다.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걷기 시작하면 마법처럼 고민과 기분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나는 그의 걷기 예찬에 무척이나 공감한다. 내 생활을 돌이켜봤을 때, 활력적이고 즐거웠던 시간이 많은 시절은 내가 달리기를 취미로 즐기고 있던 때였다. 걷기와 달리기의 매커니즘은 거의 같다. 바깥 공기의 미세한 변화를 느끼면서, 내 두 다리로 걷는다는 것. 내가 기껏해야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온몸에게 깨우치고, 내 힘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는 것. 별것 아닌 이 걸음걸이가 가만히 앉거나 누워있는 것보다 훨씬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니, 걷지 않고 버티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하정우처럼 하루에 3만보나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시간이 많은 사람일거야, 에너지가 많은 사람일거야, 나는 아마 안 될거야,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생각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하루의 일정 시간을 '직장'이라는 공간에 메인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은 출근 전과 퇴근 후 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시간을 함부로 활용했다가는,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 쉬울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에너지를 어떻게 활력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냐다. 사실 회사일만으로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회사일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의 사업이 아닌 이상, 회사의 일만으로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거다. 결국 피곤해도, 힘들어도 걸어야 한다. 심장병학회에서 제안하는 걸음수는 1만보라고 하니, 적은 양은 아니지만 걸어보겠다고 다짐하고 하루를 운용하는 것만으로 일상에는 작은 균열이 생길 것이고, 그 균열 사이로 활력이 샘솟을 것이다.


하정우가 휴식에 대한 관점도 상당히 멋지다. 휴식이라 하면 대체로 '아무것도 안 하기'를 휴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진정 휴식을 위해서는 쉬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게 하정우 생각이다. 늘어져 있으면 생각도 늘어지고, 감정도 늘어진다. 하루종일 쉰다는 명목으로 잠만 자고 나면, 휴일이 허무하게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정신 차리고 일해야 할 시간이 와도 몽롱해지기 쉽다. 오히려 '최소한의 수면시간' 혹은 '낮잠시간'을 정해놓고, 나머지 시간은 무언가에 몰입해야 휴식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하정우는 그 시간을 육체를 움직이는 시간, 걷는 시간으로 활용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 일과 휴식을 어중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 같은 얼토당토 않은 핑계를 대지 않는 것."


활동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하정우의 삶의 태도는 기존의 예술가의 삶의 태도와 무척이나 거리가 멀어보인다. 대게 예술가의 삶은 무질서에 찌들대로 찌들어, 몽롱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하정우가 말하는 좋은 삶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이 명료한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예술가의 삶에 건강함, 끈기 같은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 아니긴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달리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소설가 최민석도 그랬다. 마루야마 겐지도 눈과 몸매를 보면 그 사람이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무절제하게 살면서 제대로 된 작품을 써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하정우도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맥을 같이 한다.


"내 몸과 삶에 나쁜 것은, 내 작품에도 좋지 않다. 부정적인 충동은 절대 예술가의 연료가 될 수 없다. 예술가의 삶은 단 한순간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이를 통해 인각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루에 단 하나의 점만 캔버스에 찍어나가도 10년이 지나면 나의 시간이 집적된 작품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단순한 비유이지만, 나는 예술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때로는 두렵고 또 때론 지루한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도 눈 여겨볼만 한데, 그는 '연출'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있는 듯하다. 사실 제작 현장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두 모여있다. 멍청한 연출가는 그들을 통제하고, 똑똑한 연출가는 그들을 활용한다. 멍청한 연출가는 스탭들이 잘 모른다고 전제하고, 똑똑한 연출가는 스탭들이 본인보다 더 잘 안다고 전제한다. (본인보다 각 분야에서 똑똑한 스탭을 알아보는 눈도 갖고 있다.) 하정우는 두 번의 장편 연출만을 통해 그것을 터득했다고 하니, 기본적으로 정말 똑똑한 사람인 듯하다. 거기에 걷기로 다져진 활력과 인간적인 매력까지 갖춘 사람이니, 그 누가 그를 싫어하겠는가. 다음 장편 영화는 조금 더 터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다.


"영화감독이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로구나. 각 파트에서 알아서 하게끔, 자연스럽게 굴러가게끔 조율하고 가이드하면 족한 것이구나. 굳이 제일 앞에 나서서 모니터 가려가면서 목청 높이고 스태프들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새삼스레 감독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오늘은 더 걸어야겠다. 걸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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