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 안을 들여다보던 할머니께서, 어쩜 아이가 이렇게 귀엽냐며 얼굴을 들이민다. 눈싸움을 하듯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울먹거리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나는 아이를 안아들며 할머니와 눈을 마주친다. 서로 다른 민망함이 교차하며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돌이 가까워질수록 아이는 낯가림이 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연령대의 사람들을 볼 때면 울어버리는 통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친할머니마저도 도통 다가오지를 못 하게 하니 고민이 깊어지던 때, 세 살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아가들이 노인들을 보면 무서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이 말에 내가 괜히 서러움을 느끼는 것은, 나도 나이 듦을 부쩍 실감하는 중인 탓이다.
아이를 낳고, 삼십 대 중반 끝자락에 들어서며 내 나이를 의식하는 일이 늘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코앞까지 거울을 들이대고, 눈가 주름부터 모공까지 강박적으로 뜯어보다가 시간을 보낸다. TV에서 하루 종일 틀어대는 노화 방지 크림 광고에 솔깃하고, 각종 시술 정보 사이트들을 북마크해 놓고는 한다.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글로벌 시대이니 만 나이로 말할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지킬까 쭈뼛대고,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느니 입 바른 소리라도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노화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적인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늙어가느니 영혼을 팔겠다는 도리안 그레이나 마법 거울을 바라보며 늙어 감을 한탄하던 《백설공주》 속 왕비만 보더라도, 노화에 대한 두려움은 유구하다. 어릴 적 보았던 영화에서는 늙어버린 주인공이 한 때의 미모를 되찾기 위해 살인마저 저지르지 않던가. 실현가능성은 없을지언정, 그 심정만은 이해되고도 남는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연예인들의 사진을 강박적으로 살피며 주름 하나, 기미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안심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는지 생각해본다. 저토록 눈부시고 찬란한 이들도 결국 시간의 잔혹함에 스러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연대감이다. 탱탱하던 피부에 깊은 주름이 파이고, 곧게 하늘을 향하던 척추는 점차 땅을 향해 굽어지고, 단단하던 이빨은 하나둘 잇몸에서 떨어져나가고, 먼 산 너머까지 선명히 초점이 어리던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젊음을 지나 살아남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최종장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다독임이며, 자기 위안이다.
노화가 두려운 것이 신체의 쇠락 때문만은 아니다. 살아갈 시간보다 살아낸 시간이 더 많다는 깨달음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음을 실감하게 한다. 젊은 날을 살아가게 했던 열정, 소명 의식, 꿈의 소멸이야말로 생명의 증발과 다름 아니다.
아,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삶을 살아가며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고, 늙어 감이란 그 중에서도 최고봉인 것을.
한 때 푸른 잎사귀와 싱싱한 열매들이 가득 매달렸을 겨울 고목의 초라한 모습을 한탄하며 제2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자니, 기왕지사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젊음이라면 홀연히 털어버리자고 다짐해본다. “지나가 버린 어린 시절에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예쁜 꿈도 꾸었다”며 지나간 세월들에 미련 남은 옛 연인처럼 질척대기보다, 시원하게 “케세라세라 흘러가는 대로”를 흥얼거려주며 다가오는 세월을 열린 가슴으로 받아들여 보자고. 내게 다가오는 노화의 손을 용감하게 붙잡고, 온몸을 활짝 펼쳐 세월의 풍파를 멋지게 맞이하자고 말이다.
멀리서 찾아보고 가까이서 훑어보면, 아름답고 멋지게 노화를 즐기는 이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각종 SNS를 섭렵해 온라인 스타로 이름을 날리는 할머니, ‘테리우스 시니어’라 불리며 패션계에서 20대 청년들보다도 명성이 높은 할아버지 모델. 비단 이런 ‘특별한 사례’들이 아니더라도, 늘그막에 당당히 학교 졸업장을 거머쥔 만학도 어르신들, 직장인으로서 사회 은퇴 후 각종 봉사활동, 동아리 활동, 배움 활동을 통해 인생 제2막으로 발을 내딛으신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인생에 늦은 때란 결코 없으며, 모든 순간 순간이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것을 삶의 매 분 매 초를 통해 몸소 증명해 보이는 이들. 이러한 사람들의 사례가 더욱 많아질수록, 노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도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 믿는다.
모두에게 평등한 시간이 각기 삶을 살아가며 다른 가치로 환산되는 것은, 흔하고 뻔할 뿐인 말일지언정 결국 마음가짐이다. 신체의 나이를 측정하는 지표가 주름살, 줄어드는 근육량, 검버섯, 쇠락해가는 육신 그 자체라면, 마음의 나이를 나타내는 것은 앞서 말한 듯이 열정, 소명 의식, 그리고 꿈인 것이다.
꿈이 있어도 젊은이들만큼 속도를 낼 수 없기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면, 달리는 이들 뒤에서 꾸준히 걸으면 그만이다. 살아온 시간들이 증명하지 않는가. 아직도 길고 긴 인생에서 고작 몇 년, 몇 달, 며칠 늦는다고 하여 큰일이 나는 법이란 좀처럼 없다. 묵묵히 꾸준히 걷다 보면 결국 목적지와의 거리는 좁혀지기 마련이라는 여유란, 오직 세월을 지나온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의식이다.
어느 글에서 말하기를, ‘늙음은 나이를 더해가는 게 아니라 인생의 깊이만큼 혼자 물을 들이는 일’이라고 한다. 한그루 단풍나무처럼 아름답게 성숙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남은 나의 인생은 무엇으로 채워 어떻게 물들여야 할까, 생각해볼 일이다. ‘멋지게 늙기’, ‘아름다운 노인이 되기’라는 거창하고 부담스러운 목표를 세우기 전에, 무엇으로 나의 인생을 채워 성숙으로 나아갈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이 역시 지나가는 시간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다가오는 시간들 속 많은 시련과 행복, 고통과 환희, 우연과 숙명들을 온 몸으로 맞서며 터득해갈 것들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주름살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내 아이가 훗날 어른이 되고, 중년으로 들어섬을 자각하는 어느 날, 오늘날의 나처럼 늙어 감을 두려워하며 젊은 날을 아쉬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흘러가는 세월들과는 그저 오래된 친구인양 담담히 작별하고, 쉴새없이 밀려오는 시간들을 담담히 품에 안고 다독이며 계속 나아가기를 소망할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