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억을 기록하는가.

by 레메디오스

TV 속에선 몇 분 째 법정 다툼이 한창이다. 이혼법정이다. 한 때는 사랑했을 남녀가 과거의 온갖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서로를 공격하는 광경이 참혹하기도 하다. 둘 중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 과연 흥미진진한 가운데, 나는 자연스레 생각의 곁길로 선회(旋回)한다.


요컨대, 다툼의 주체는 사람이 아닌 기억, 그 자체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증거는 남는다. 아주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소멸되지 않고 언젠가 발굴되기 마련이다. 피해자의 집념이 미치는 최후이자 미지의 영역이다. 더 나아가 증인이란 한 겹 더 불가사의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증인의 기억이 그렇다. 바로 어제 먹은 식사 메뉴도 제대로 생각해내기 어려운 날들이 많거늘, 수십, 수백 만 분의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서 모호함을 소거한 완벽한 기억을 꺼내들다니, 경이(驚異)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기억’이 있다.


은행 ATM 앞에 서서 인출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노라면 벽에 붙은 전단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실종 아동 전단, 흉악범 수배 전단 등 찾아야 하는 사람들, 잡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상명세가 빽빽하다. 하나라도 기억해보자 싶어 얼굴을 세심히 살피고 이름, 나이, 특이사항을 곱씹어보지만, 인출이 완료되고 돌아섬과 동시에 잊어버린다.


주변인들을 기억하는 일도 내게는 난제다. 한두 번 만난 사람은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 얼굴과 이름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일상다반사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기억나면 다행이다. 지금 근무하는 사무실의 같은 층 직원들 중에서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절반 이상일 것이다. 덕분에 애꿎은 인사성만 밝아졌다. 알든 모르든 일단 눈이 마주치면 고개 숙여 인사부터 하고 보는 까닭이다.


어쩌다가 알 듯 말 듯 인상이 가물가물한 사람이 내게 반말로 말을 건네면 그때부터 장르는 스릴러이다. 머릿속에서 삐삐 경고음이 울리며 온갖 판단 회로가 급속히 돌아간다. 나와 동갑인가, 아니면 나보다 상급자인가. 나 또한 반말로 대응해도 되는 상대인가, 아니면 나는 존대를 해야 하는가. 금방이라도 기억이 나거나 판단이 서면 다행이지만, 끝끝내 그렇지 못할 경우 입에서 나오는 문장들의 형태는 어그러진다. ‘의도적인 종결 어미의 생략’으로 상대가 듣기에 존대인지, 반말인지 애매한 반쪽짜리 말들을 내뱉는 것이다. 나름 내게는 사회 평판을 건, 혼자만의 심각한 정치 투쟁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라는 사람이 말한 명제하나가 생각난다. ‘기억이란 반복이다’라고 했던가. 잘 기억하려면 잠꼬대로도 욀 만큼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달달달 반복해서 입에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이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외우고 기억해야 할 것들은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데, 기억 속 저장 공간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니. 차라리 기억 속 공간에 칼집을 내어 기억해야 할 것들을 새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일인가. 뇌에 연결할 수 있는 대용량 저장 장치는 대체 언제쯤 현실화될는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생생하던 기억이 오늘은 희미하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공포인가. 기억만큼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흥망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도 없다. 영어 단어 하나, 시사용어 하나하나를 욀 때 여실히 실감하고는 한다. 하루 10분 동안 열 개고, 스무 개고 술술 외워지는 날이면 나 자신이 녹슬지 않았음을 만끽하며 안도한다. 어제 외운 단어가 오늘 생각나지 않으면 낡은 나 자신을 느끼며 좌절하고 만다.


건망증, 나아가 치매라는 병이 현대인들에게 최상위급 공포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치매는 판단력 저하, 망상증, 과식증 등 여러 증세들을 수반(隨伴)한다지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인지 능력 저하, 기억의 상실일 것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사람들이 쌓아온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지지 기반이다. 즉 기억이 무너지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 역시 위태로워진다. 이는 곧 한 세계의 붕괴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한평생 조금이라도 더 기억을 붙잡아보려 효과적인 암기법을 찾고, 시간을 내어 두뇌 훈련을 하고, 기억력에 좋은 음식, 기억력을 증진시켜주는 약 등에 집착한다.


한 때 기억의 소실(消失)이란 낭만의 극치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곁을 지키는 사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머릿속의 지우개》, 《겨울연가》 등의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며, 나도 그러한 이야기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금은 그 이면을 본다. 잃어가는 기억 속, 주인공의 두려움과 혼란을 본다. 그들은 비극의 저편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열광하고 열망함은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던가.


수천 년 전에는 동굴 벽에 기록을 새기고, 그로부터 수백 년 후에는 활자에 열광하던 인류가 지금은 SNS에 몰두한다. 이 모든 것 또한 힘껏 기억해 보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짐작해본다.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다가도 생긋 웃으며 셀프 카메라 촬영을 하고, 음식을 먹기 전 반드시 사진을 찍고, 데이트를 할 때마다 마치 사랑의 스위치라도 누르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 수십 가지의 기억 후보들 중 가장 좋은 것만을 선별해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고, 그들을 내 아름다운 추억 속 미지의 증인으로 세워두는 것. 기왕지사 모든 기억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점철되기를 바라는, 경건한 제의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고대부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 중독증을 앓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억의 소실을 맞닥뜨린 타인의 이야기들을 접하면 슬프기보다 섬뜩하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며칠이 지나 점점 희미해지는 어머니의 기억에 오열하고 말았다는 한 아들의 사연처럼, 아슬아슬하던 기억의 끈이 끊어지고 만 사람들의 절망감이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사라지는 기억 속 잔상들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망각이란 신의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많은 기억들 중 나쁜 기억들을 자연스레 지워감으로써, 인간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생이나마 살아보니 진리에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들의 잔상이 지독한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며, 망각이야말로 광기의 도화선이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대체 기억이란, 유령과 무엇이 다른가. ‘실체가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공통분모가 나를 비약(飛躍) 속으로 밀어 넣는다. 아아, ‘유령 하나가 떠돈다. 기억이라는 유령이다.’


이왕에 그렇다면 내 삶에는 보내고 싶은 기억보다 붙잡고 싶은 기억이 더 많기를 소망해본다. 붙잡고 싶은 기억이 많을수록 무릇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기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행복의 지표라는 깨달음이다. 기억이라는 유령을 상대로 처절한 집착의 병자라도 되어 보랴. 살아가며 맞이하는 모든 순간들을 즐기며, 끊임없이 쓰고, 기록하고, 되새겨 볼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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