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두려워했다.

거절을 두려워했던 나의 이기심에 대하여

by 레메디오스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학원으로부터 초등학생 대상 영어 수업 제의가 있었다.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수업 시간도 좋고, 출퇴근 거리도 가까워 냉큼 받아들였다. 2018년 이후 2년 간 학원을 꾸려오셨다는 원장님은 의욕적이었고, 아직 초보 강사인 나를 할 수 있다며 북돋아주셨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정해진 날부터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원장님께 ‘죄송하지만 정해진 날에 입사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연락을 드리자, 원장님께서는 사정을 듣고는 ‘곤란한 상황이지만, 기다려주겠다’며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그 배려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수화기 너머에 ‘열심히 하겠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입사일 바로 전 주의 금요일, 원장님께 급히 전화가 왔다. 코로나 사태로 학원이 영업 중단 상태라 초빙할 수가 없으니, 출근을 미뤄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제가 새 일을 찾는 게 좋을까요?’라고 묻는 내게, 원장님께서는 ‘빠른 시일 내에 부를 테니, 반드시 기다려 달라’며 신신당부했다.


도대체 언제 이 사태가 종식되어 학원이 다시 영업을 할지, 언제부터 출근을 하게 될지 명확한 게 아무 것도 없는 사태에서, 나는 불안해졌다. 얼마 간 시간이 흐르며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다른 곳에서 업무 제안이 들어왔다. 면접에 참석해보니 기관의 규모도, 급여 조건도 훨씬 매력적이었다. 금세 마음이 기울었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 나를 계속 맡겨두느니, 바로 앞에 보이는 확실한 것에 어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원장님께 이제 와서 거절 의사를 밝히려니, 참 고역이었다. 며칠을 미루다가 겨우 연락을 드리니,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저편에서 당혹과 실망이 몰려왔다.


“아니, 오신다고 해서 다 준비를 해 놨는데. 이제 와서 그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 번 거절했음에도 계속 기다려주신 데 감사드리지만,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일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정말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했지만, 상대편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장장 15분에 걸친 넋두리 끝에서야 겨우 통화를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구인자가 사람을 고를 수 있듯이, 구직자도 당연히 일터를 고를 수 있는 거 아닌가? 다른 후보자에게 연락하면 되지 끝까지 나한테 이럴 일이야?’


생각보다 격렬한 상대의 분노에 나 역시 억울한 감정이었다. 친한 친구와 가족들에게 속상한 감정을 토로하며 이해와 위로를 구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찝찝함과 죄책감이 가시지 않은 것은, 실은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나빴다.


아예 처음부터 명확하게 거절했다면, 혹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연락했다면 원장님도 나 때문에 언짢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실망할까봐, 미안한 마음에 그랬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이 또한 핑계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싫은 소리를 들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전 직장에서도 그랬다. 다른 팀의 업무까지 해 달라는 대로 떠안고는 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일들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군데군데 구멍이 났다. 어처구니도 없는 실수들을 메꾸느라,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게 나란 사람이었다. 거절 ‘당하다’와 거절 ‘하다’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하다’를 선택해 왔다. 타인의 손을 내쳐야 하는 거절이란, 나 자신을 가해자의 위치에 놓는 행위라는 인식이 내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친절한 사람으로, 부탁하면 뭐든지 해결해주는 능력 있는 해결사로 사람들이 나를 봐 주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나에게 실망하는 게 싫기도 했다. 까다로운 사람, 매정한 사람이라며 나를 두고 뒤에서 오가는 말들이 무서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현명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거절을 피해왔던 나 자신이, 그렇기에 더욱 이기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절, 그 순간의 죄책감을 피하자고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곤란했는가. 또한 내 자신도 더욱 괴롭지 않았는지.


스티브 잡스의 말을 머리에 떠올리며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거나 과중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천 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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