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 부러진 발목과 데이트

by 레메디오스

뉴스에서도 연신 보도할 만큼, 그날은 역대급 폭설이었다.

땅에 발을 디디면 발목까지 눈에 푹 파묻히던 그날, 나는 오랜만에 참 바빴다. 오전 일찍 토익 시험을 보고 나서, 바로 1시에 소개팅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공대 오빠’와.


당시 ‘공대 오빠’에 대한 환상-이지적이고 이성적인-이 충만했던 나는 토익 시험이 끝나자마자 머물던 하숙집으로 달려왔다. 2시간여의 영어 문제 풀이에 찌든 얼굴을 다시 단장하고, 청순함을 배가시켜주는 치마에, 무릎까지 올라온 가죽 덕분에 다리가 더욱 길어보이는 킬힐 부츠까지 장착 후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몇 분 걷지도 못하고, 말 그대로 ‘굴렀다’.


당시 내가 살던 하숙집은 신촌 모 여대의 정문 인근에 위치했다. 특히나 그곳은, (조금의 과장을 섞어) 270도에 육박하는 엄청난 경사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경사의 위험성을 알리는 실험 소재로 방송에 나왔다는 말-끝끝내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경사의 길이 눈에 파묻혔으니, 넘어지는 것도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울 터였다.


머리부터 어깨, 팔까지 눈을 털고 일어나니 왼쪽 발목이 시큼했다. 딱딱한 가죽에 감싸인 발목이 비틀려버린 탓이었다. 다리를 삔 건가-생각하고는 조금씩 절뚝이며 다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걸을수록 통증이 심해지는 듯했지만, 일정을 취소하기에는 이미 약속 시간까지 20여 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추워서 감각이 마비된 탓인지 아니면 조금씩 고통에 익숙해지는 덕분인지 용케도 성실히 걸어 나갔다. 무려 2호선 이대입구역부터 현대백화점까지 말이다.


현대백화점 정문 앞에 서서 소개팅 상대를 기다렸다. 가만히 서 있으니, 다시 통증이 올라왔다. 아니, 가속화됐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비명을 지르고 싶을 수준이었다. 다리를 삐면 보통 이렇게 아픈 건가, 사고마저 마비될 듯한 순간, 소개팅 상대가 나타났다. 추우니 자리를 옮길까요, 묻는 남자에게, 나는 다급히 말했다.


“죄송한데, 혹시 응급실부터 갈 수 있을까요? 제가 오다가 넘어졌는데, 다리를 다친 것 같아서요.”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지만, 눈코입 위에 나타난 황당한 표정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 만난 소개팅 상대가 다짜고짜 병원부터 가자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가야겠다는 사람을 그냥 둘 수도 없으니, 남자는 기꺼이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동행했다.


검사 결과, 내 발목은 아주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어찌나 깔끔한지, 깁스한 채 조심만 한다면 수술 필요 없이 그대로 붙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단순히 삔 줄 알았던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을 들으니 등 뒤에 소름이 밀려왔다. 부서진 다리로 무려 지하철 한 정거장을 걸어 소개팅을 나왔다니, 의지력의 승리인지 둔감함의 증명인지.


그 날의 소개팅은 그렇게 응급실에서 시작하여 응급실에서 끝났다. 응급실에서의 첫 데이트가 참 인상 깊었는지, 그 후 몇 번의 만남이 더 있긴 했다. 그러나 설렘이 아닌 희극으로 시작한 관계가 연애감정으로 발달하기엔 한계가 있었는지, 곧 둘의 만남은 흐지부지해졌다. 연구실로 다시 돌아간 그 분이 봄빛의 설렘을 찾았을는지 끝내 들은 바는 없다.


여담이지만, 내 다리는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고난을 겪어야했다. 깁스를 한 탓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채 설 명절을 보내는 나를 가엾이 여긴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께서 떡이며 나물, 떡국 등 명절 음식을 가져다 주셨는데, 그릇을 돌려드리러 계단을 내려가다가 굴러버린 탓이다. 운이 좋을 경우 수술 없이도 나을 수 있었던 내 다리는,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결국 차디찬 수술대 위에 올라야 했다.


그 날 이후 얻은 몇 가지 교훈이 있다. 첫째, 눈 오는 날에는 절대로 무릎까지 올라오는 킬힐 부츠를 신지 말 것. 둘째, 눈 오는 날에는 굽 있는 신발을 신지 말 것. 셋째, 조금이라도 아프면 제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것. 그 때의 고통을 몸이 기억하는지, 이제는 길이 조금이라도 얼어있으면 알아서 몸이 사려지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나마 딱 한 가지, 좋은 기억이 있다면, 그날 본 토익 점수가 아주 쓸만했다는 것, 그것뿐이더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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