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시작은,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온다.

<나도 작가다 공모전> 참여글

by 레메디오스

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교재 한 줄이라도 더 외워야 하는 이 때, 불쑥 떠오르는 의문들이 나의 생각을 멈춰 세웠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며 암기를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술과 혀, 연습장 위를 서걱거리던 펜도 덩달아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말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내 인생, 이대로 흘러가도 괜찮을까?


사범대에 진학한 것이 완전히 타의(他意)는 아니었다. 굳이 수치화한다면 타의 70%, 자의 30% 정도일까. 막연히 일본 애니메이션 전문 번역가를 꿈꾸며 일어일문학과를 지망했지만, 국어국문학에 흥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장씩 수학 문제를 풀던 고3 자율학습 시절에도 몰래 각종 소설책과 시집들을 문제집 안에 끼워 넣고 읽던 나였다. 교사야말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라고 말씀하시던 부모님, 취미 중 으뜸이었던 독서, 아주 희미하지만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국어에 대한 흥미, 제대로 졸업만 한다면 교원자격증까지 얻을 수 있다는 메리트. 내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에 진학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일본어 공부야,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 병행할 수도 있고, 굳이 어렵다면 여가 시간에 학원을 다녀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대학 생활은 무척 재미있었다. 단순히 국어와 문학의 이분법으로만 보았던 국어국문학의 세계는 생각보다도 훨씬 다채로웠다. 음운론과 음성학을 배우며 골머리를 썩기도, 중세국어를 공부하다가 새벽에 토하기도 했던 날들, 각종 고전소설과 시가들 원전을 보며 고래고래 조상님들 욕을 하던 날들 모두 언제 돌이켜도 소중하다. 선배들에게 이끌려 든 여행 동아리 활동, 학과 친구들과의 밤샘 시험공부, 교육 봉사 활동과 교생 실습까지, 내 대학 생활은 한치의 후회도 없는 최선의 선택이며, 여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대로 교원의 길까지 나아가면 될 가장 중요한 시기, 사범대 학생들이라면 응당 임용고사 준비에 본격 돌입할 시기, 바로 3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에야 다른 생각들이 나를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잡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입학 이래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성실하게 학점 관리를 해 가며, 오직 임용고사 합격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하루 열두 시간씩 공부해도 모자랄 이 때, 예기치 못한 생각들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도 교수님께 상담을 청하기도, 임용고사에 합격해 교단에 서는 선배들을 찾아가기도 하며 발버둥 쳤지만 한 번 자각한 생각은 점점 더 덩치를 키워갔다. 밤새 합격 수기를 읽어보아도 ‘대단하네’ 생각하고 말뿐, 큰 자극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학과 독서실에 앉아 죽도록 공부하는 선배와 동기들 사이에서 나 홀로 외딴 섬이었다.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제대로 된 교사가 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교사란 무엇인가. 사전에 등재된 바로 ‘학교 등의 교육 기관에서 일정한 자격으로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일정한 자격이란 무엇인가. 교과 지식뿐 아니라 인성, 경험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고작 몇 년 간 전공 공부에 매달린 것만으로, 내가 과연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 구석에 자리하며 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히곤 했던 의문이었다.


답은 항상 싱거울 정도로 간단했다. 나는 아직도 불완전하며 방황하는 청년에 불과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처럼 나보다 학생들을 우선하는 ‘선생님’이 될 수 있는가. 고작 교육 공무원이라는 직위의 안정성만을 바라고 뛰어드는 길은 아닌가. 고작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길’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 열망의 계기란 어쩜 이리도 운명적이며, 우연적이었는지. 2학년 2학기를 지나며 몇 달 간, 학교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의 일이다. 일명 ‘저소득층 아동 대상 일대일 멘토링’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저소득층 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무료 교육 봉사 활동이었다. 내가 배정된 가정은 전형적인 달동네에 위치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어느 한 장면이 연상될 법한 동네였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와 아버지, 어머니로 이루어진 이 가정은 작은 크기의 방 하나와 부엌으로만 이루어진 집에서 살고 있었다. 화장실이 없어 외부에 마련된 공용 화장실을 사용하고, 목욕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 부엌에서 해야만 하는 그런 곳.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도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그 아이가 살고 있었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한 풍경 하나가 있다. 그 아이 혼자 남아있는 집 담벼락을 거대한 포클레인이 허물고 있는 모습이다. 그 거대한 팔을 한 번 휩쓸 때마다 일으키는 모래바람이 아이의 온 몸을 때리고 있던 광경을, 그날 나는 대문 앞에 서서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사각사각 소리가 연필 소리인지, 모래 소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던 그날, 문제 풀이를 하다 말고 아이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이제 여기서 살면 안 된대요.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도 찾아와주실 수 있으세요?”


갈 곳도 없이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아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몰릴 가족들, 아주 최소한의 학습권도 생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그 모습이 나를 아프게 했다. 학교 교수님께도 말씀드려 보고, 교내 봉사센터에도 알렸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발만 동동거리고 있던 중, 한 선배가 지나가듯 말했다.


“이런 건 언론에서 한 번 때려주면 들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언론(言論). 나와 관련 있으리라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그 두 글자가 내 가슴을 세게 때린 순간이었다.


당시 내가 언론이나 미디어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에 가까웠다 한들 언론고시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주요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가 되기 위해 많게는 10년 넘는 세월 동안 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하는 사람들, 수백 대 일에 육박하는 경쟁률 등은 내게 도시전설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그 대열에 발을 들여놓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졸업과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출발이 한참은 뒤처지고 말리라는 자각도 있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가슴 울림. 이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나를 잠식했다.


첩첩이 생각이 쌓여갈수록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내가 교단에 서는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두 분의 얼굴 위로 ‘실망’과 ‘고통’이라는 표정이 나타나는 순간 죽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주군의 등에 칼을 꽂아야만 하는 충신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가슴을 앓았다.


밤낮을 넘나들며 며칠 간 고민하던 중, 부모님께서 항상 내게 해 주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부모가 바라는 방향이 있을지언정,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식의 행복이라는 것. 그리고 나는 감히, 그 마음에 걸어보기로 했다.


독서실 의자를 박차고 나와 집을 향해 내달렸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려면 바로 지금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결심이 선 바로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 또 긴 시간을 고민하며 허비하고 말 것이라는 예지였다. 너무 내달린 탓에 숨이 찬 것인지, 혹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목까지 차오른 무언가를 토해낼 것만 같았다. 나의 꿈, 나의 비전을 논리정연하고 담대하게 말씀드리리라. 해야 할 말들을 머릿속에서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 어머니와 마주한 순간, 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께 냅다 내지르고 말았다.


“나, 임용고사 보기 싫어. 다른 거 하고 싶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연습했던 우아한 설득 대신, 날것의 감정이 멋대로 튀어나오고 만 것이다. 그 후 몇 번인가의 충돌이 있었다. 대학 입학 이래 정해진 길을 차곡차곡 달리는 줄 알았던 딸이 갑자기 방향을 틀며 돌진할 때 당황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일단 질러버린 이후 나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설득에 성공했다. 정 그러하다면 정말 죽겠다 싶을 때까지 한 번 부딪혀보라는, 패배 선언이자 가장 든든한 응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들었던 독서실 책상을 정리했다. 총무에게 ‘자리를 내놓았으니, 필요로 하는 다른 동기나 선배에게 넘겨달라’ 말했다. 다른 곳에서 공부할 생각이냐는 그의 말에 나는 말했다.


“좀 더 방황해 보겠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 설령 성공한다 한들, 막상 들어선 길은 꽃길이 아닌 가시덩굴임을 깨닫고 절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도전하겠다. 내 마음의 부름이 향하는 곳으로 향해보겠다. 지금 이 순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당연히 이후 과정들은 녹록치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고된 여정이었다. 내가 평생 느낄 좌절의 총량 중 대부분을 이 때 느꼈다고 확신할 정도였으며, 결국 꿈꾸던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길을 향해 확신 없는 방향으로 발을 내딛었다는 것. 마음이 말하는 대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것, 그 자체가 내 인생에서 다시 없을 크나큰 기회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는 시작을 온몸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용기, 내가 얻은 이 소중한 교훈이야말로 이후 내 인생을 지탱해주는 자양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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