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8개월 차에 접어든 아이와 매일 손뼉 치며 놀다보니, 각종 동요와 동화들에 둘러싸여 일상을 유영하는 중이다. 아이와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다 보면 간혹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동요 중 하나인 ‘멋쟁이 토마토’가 그렇다. 큰 내용을 보면 토마토의 포부를 그리는 귀여운 노래인데,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엽기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울퉁불퉁 멋진 몸매에 / 빨간 옷을 입고 / 새콤달콤 향내 풍기는 / 멋쟁이 토마토 / 나는야 주스 될 거야 / 나는야 케첩 될 거야 / 나는야 춤을 출 거야 / 뽐내는 토마토'
토마토가 웃는 얼굴로 자기 몸을 갈아 주스나 케첩이 되겠다는데, 이게 웬 신종자살법인가 싶어 1차 뇌 정지를 겪고, 청춘 시절 새벽마다 부모님 몰래 감상했던 각종 피범벅 고어 영화들의 장면이 떠올라 2차 충격이 밀려온다. 내가 그러든 말든, 아이는 이 음악만 나오면 신나서 몸을 흔들며 꺄르르 웃으니, 아이와 나의 관점은 다르겠지 싶어 좋은 게 좋은 거다-할 뿐이다.
최근에 아이가 푹 빠져버린 동화도, 어른의 관점에서 내용을 살피면 참 묘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에 곰 아저씨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에 들려는데,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곰 아저씨가 묻자 이상한 목소리로 바깥이 추우니 문을 열어달라며 흐느낀다. 무섭고 이상한 기분에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는데도 바깥 너머 존재는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고, 곰 아저씨는 ‘귀신일지도 몰라. 사악한 마녀야. 괴물일 거야!’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떤다. “저리 가! 낯선 이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야!”라고 곰 아저씨가 외치자, 바깥 존재는 그때서야 “저는 아저씨의 친구 쥐돌이.”라며 문을 열어줄 것을 청한다. 미지의 방문자가 아는 이라는 것을 깨닫자 곰 아저씨는 안심하고 문을 여는데, 쥐돌이 뒤로 귀신, 마녀, 괴물들이 즐비해 있고, 쥐돌이가 “자, 이제 저녁 식사를 먹자”고 말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이 동화가 나만 무서운가 싶어 친구들에게 물으니, 이구동성으로 이건 원한관계에 의한 범죄 모의라는 결론이다. 곰 아저씨가 쥐돌이에게 무엇을 잘못했나부터 시작해서, 쥐돌이가 말하는 ‘저녁 식사’란 곰 아저씨에게서 강탈해내겠다는 건지, 곰 아저씨를 저녁 식사로 먹겠다는 건지에 대한 백분토론이 펼쳐진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약한 어린이는 죽음뿐인 독일 동화’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호기심이 들어 게시물을 열어보니, 짧디 짧은 이야기 속 세계관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다.
‘수프를 먹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었답니다. 점점 말라갔답니다. 5일 뒤 죽었답니다.’
‘성냥을 가지고 놀았답니다. 죽었답니다.’
‘엄지손가락을 빠는 소년이 있었답니다. 계속 빨았답니다. 재봉사가 엄지를 잘라갔답니다. 빨 엄지가 없어졌답니다.’
도대체 이 시대에는 어린 아이를 어떤 존재로 인식했던 걸까, 잠시 연구에 대한 의지가 솟아 관련 정보들을 검색해보니, 위 동화책은 하인리히 호프만의 그림책으로 ADHD 아동의 과잉행동과 저지 방안을 다룬 것이며, 또한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아이는 엄격히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는 정보가 나온다.
어린 시절 『백작 카인』이라는 만화책을 보던 중, ‘마더 구즈’라는 개념을 접하고 호기심에 열심히 탐닉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나를 죽이고 아빠가 나를 수프로 만들어 먹었네’ 류의 잔혹한 이야기들이었는데, 서양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걸 들으며 자라는구나 생각하며 충격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다만 도리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전래동화들도 온화하지만은 않다. 아동 학대와 친족 살인으로 점철된 ‘콩쥐 팥쥐’, ‘장화홍련’에, 성인이 되어 보니 절도에 납치, 강제결혼까지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는 ‘선녀와 나무꾼’도. 아무래도 성인이 되고 나니 동화를 순수하게만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나보다 싶은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엄마가 쓸데없는 상념에 빠진 와중에도, 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웅얼웅얼 “터마 터마” 하며 즐겁게 토마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