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삶을 스미다

by 레메디오스

도시인들이 아파트를 떠난다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은 일이다. 땅이 인간이란 존재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다다르니, 사람들은 한층한층 하늘로 솟아오를 수밖에 도리가 없다. 땅에 발붙일 곳이 없는 이들은 바벨탑을 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하늘을 뚫고 높이 더 높이 오르는 저 거대한 위용의 빌딩들은 이러한 인간들의 존재론적 비극에 대한 증명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땅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숲이다. 수십·수백 개의 초록빛, 갈빛, 붉은 빛들이 한데 어울린 생명의 흔적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 품 가득 안은 청아한 숲이다. 생명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담은 존재 말이다.


그렇기에 셀 수 없는 마천루 속, 인간들은 아득바득 숲을 심어 넣고 구겨 넣고 채워넣는다.

차가운 콘크리트 기운들은 한낮의 햇살과 새벽의 이슬을 머금는 바윗돌과 푸른 나무 그늘, 생동하는 꽃과 이름 모를 잡초들에 둘러싸여 온기를 얻는다.


이제 막 19개월 차에 접어든 딸아이 덕에, 나는 매일 한낮의 숲을 유영하는 행운을 얻었다. 신발 신기에 맛을 들인 아이가 기어코 걸어서 어린이집에 등원해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탓이다. 아이는 삐요삐요, 깔짝깔짝, 위잉위잉 다양한 소리의 신발을 매일 갈아 신고 존재감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다.


어린이집까지는 아파트 두 개 단지를 지나고도 총 43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유모차 전용 도보를 쌩쌩 달려나가면 고작 10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이의 소원대로 산책로를 돌고 돌아 걷다보면 1시간 가까이 걸리는 때도 있다. 고집만큼은 노인네처럼 완고한 아이는, 기어코 기분 따라 바람 따라 길을 따라 설렁설렁 걷는다.


오전 11시 반. 오전과 오후의 경계가 맞물린 시간이다. 신기루처럼 내려앉은 햇살이 아이가 뛰놀기에도 참으로 알맞다. 햇살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아이는 고개를 번쩍 든 채 앞도 안 보고 아장아장 걷는다. 행여 행인과 부딪힐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길을 잘못 들까 아이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다 계단까지 통과하고 나면, 그제야 나는 편안해진다.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 들어선 작은 숲은 대단지 아파트 속 공간답지 않은 적요가 있다. 커다란 뭉게구름이 지상에 내려앉은 듯 풍성한 잎을 자랑하는 주목나무가 가장 먼저 보인다. 초록빛 날카로운 침엽수 잎 사이로 새빨간 열매가 아이의 눈에 띄면, 어-마, 어-마 하며 따 달라 성화다. 열매를 따 손에 얹어주면 금세 툭 터져버려 무른 껍질과 미끌거리는 진액이 아이의 손을 더럽히고 만다. 아이는 되레 나를 원망하며 울상이다.


주목 옆으로는 산철쭉나무들이 줄을 짓는다. 봄녘에는 레드카펫에 꽃잎을 뿌려주듯 화사하던 다홍빛 꽃들이, 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하는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철쭉꽃이 온 세상에 만발하면 전국 각지에서 철쭉제가 열린다. 순정만화 속 주인공처럼 꽃잎을 입에 물고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아련한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흔해 ‘흔꽃’이라고도 불린다는 산철쭉은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과의 매개체이다.


화려한 철쭉의 저편에서 회양목들은 참으로 수줍다. 작은 소녀의 손톱만한 연둣빛 꽃들은 그마저도 녹빛 이파리 속에 숨어버려, 누가 꽃이고 누가 잎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달달한 향기는 숨길 수가 없는지, 꽃이 지고 여름이 지난 가을까지도 벌들은 잔향을 찾아 배회하고 있다.


철쭉 가지를 따라 고개를 들면 매자나무가 그 위상을 뽐내고 있다. 내 키와 얼추 비슷한 매자나무는 가을이면 새빨간 열매를 가느다란 가지에 주렁주렁 매단다. 매자나무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열매가 모두 떨어진 뒤에도, 곧 자줏빛 단풍잎들이 만발해 시선을 빼앗으니 말이다. 아이는 매자나무 아래 흩어진 단풍을 가득 줍는다. 생명은 항상 죽음과 맞닿아 있는 법이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아이는, 단풍이 내뿜는 마지막 생명의 빛에 매 초마다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생명이 연소하는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어린 생명은 계속 자라나는 것이다. 아이는 이 고운 단풍이 곧 바스라져 소멸해버릴 것임을 알지 못한다. 단풍잎을 손에 꼭 쥔 채 ‘이게 뭐예요?’라며 묻고는, 대답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 어린아이도 곧 삶과 죽음의 순환을 깨달을 것이다.


크고 작은 나무들 사이로 팬지꽃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노란색부터 자줏빛, 빨강과 파랑, 보라색까지 형형색색 다양한 게 팬지라는데, 이 숲에서는 어쩐 일인지 노란 팬지들만 가득하다. 노란색 꽃잎이 까아만 먹물로 물든 팬지는 얼핏 울먹이는 소녀의 얼굴을 닮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팬지의 특이한 모양새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인지 팬지에 얽힌 이야기들은 많기도 하다. 가련한 오필리어는 팬지를 손에 쥐고 나를 잊지 말아달라며 몸을 내던졌으며, 천사들의 축복을 받은 하이얀 제비꽃이 노오란 팬지로 변했다지 않는가. 존재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 아름다운 꽃이란 무릇 그런 것들인가 보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각기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완벽한 형태이다. 이렇듯 아이와의 산책은 이렇듯 내게 수많은 생명의 생동을 일깨운다. 그간 바쁜 일상에 헐레벌떡 뛰기만 하며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이다. 나도 언젠가는 세월의 흐름에 사라져 순환의 반열에 스며들 것이다. 이왕이면 숲 속에 스며들고 싶다. 천천히 걷고 느리게 느끼고 고요히 존재하며, 그렇게 이 길에 녹아든 자신을 발견하기를 희망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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