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리의 소공성』을 읽고.
말이 통하되, 본질이 통하지 않는 대화가 많아지고 있다.
A는 사귐이 오래지 않은 친구이다. 잠시 재직하던 회사에서 만나, 내가 퇴사한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서로와의 깊은 추억도 없고, 공감대도 얕은 이 둘 사이는 싱크대 위에 흩뿌려진 물방울들의 높이보다도 얕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둘 사이에는 대화라는 것이 이어지곤 하는데, 이른바 이런 식이다.
“어제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식빵을 샀는데 영 별로였어.”
“아, 갑자기 빵 먹고 싶네, 사러 갈까?”
“근데 슈크림빵은 좀 괜찮았던 것도 같아.”
“요즘 빵 배달 얼마부터 되지? 나가기 귀찮아.”
“근데 머핀이 없더라. 왜 요즘 안 팔지?”
둘 중 누군가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문장들의 연결성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대화의 나열로, 마치 1인극 무대에서 끊임없이 의미 없는 독백을 내뱉는 형국이다.
인터넷이라는, 그야말로 마법의 연결망이 당연한 존재가 되고 트위터부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온라인상 소통 수단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대화의 방향성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이미 일방향적이다. SNS 속 대다수 사용자들의 대화 양상이 ‘좋아요’나 ‘리트윗’만을 노리는 일방향성을 띠는 것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감정의 교류란 복잡한 것이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만 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다. 감정은 파고들수록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복잡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진심어린 위로가 수년 간 사귀어 온 친우를 멀어지게 할 때도 있으며, 분위기를 상승시켜보고자 무심코 던진 농담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일으킨다. 동의와 공감의 방향성이 어긋나거나 충돌되는 순간, 관계의 균열은 소통에 관계된 모든 이들을 상처 입힌다.
혀끝의 말이 야기하는 상처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열손가락을 입으로 삼아 크고 작은 액정 위에 숨어든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내뱉는 말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불특정 다수만이 존재한다. 반론도, 설명을 요하지도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저 흘러가버리면 그만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이리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대화양상은 역전된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필요한 이야기들만이 피상적으로 전달된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들 상대방의 말, 의견, 관점, 사고방식, 태도, 목소리, 표정까지 소통을 위한 모든 것들은 무가치한 것들로 변모하여 금세 사라질 뿐이다. 마르틴 부버가 일찍이 우려하지 않았던가.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간적 관계를 벗어나 ‘나와 너’로 향해야 한다고.
『신대리의 소공성』 속 신대리와 나과장, 선희, 하영 등 모든 등장인물들 역시 이러한 소통의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의 일정과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 직장상사, 낮은 자존감을 내재한 날카로운 독설들, 위로와 소통을 간구하는 이들이 소공성, 즉 ‘소통과 공감으로 만드는 성공적인 행복한 인생’이라는 심리상담센터에 모여들어 소통의 미스터리에 얽힌 답을 찾아간다.
주인공 신대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과 저마다의 사연들이 존재함에도, 이 책은 독자 참여형이다. 여타의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들처럼 저자의 경험에서 기인한 지극히 개인적인 교훈이나 진리를 단정 짓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타인에 대한 올바른 공감법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며 윽박지르는 대신, ‘당신이 생각하는 공감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독자들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즉 이런 식이다.
“상대의 심리를 알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적절한 질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누가 말씀해 보시겠어요?”
“상대의 말에 공감하면 이해받는 느낌이 들어 자기의 마음을 열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바로 제가 알려드리려고 했던 말입니다. 잘 말씀하셨어요.”
“어려운 대화를 풀어가는 첫 단추가 공감인 셈이네요.”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비추어 나 스스로의 감정과 표출 방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 더 나아가 삶의 양상을 뒤돌아보고 때로는 신랄히 평가하며, 때로는 다정한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 또한 어느새 소공속 속의 참여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혼자만의 세계에 있기를 갈망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를 이해 못해, 나를 견디다 못해 떠나는 이들을 내버려두는 게 ‘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가 나를 끝내 고립시키고 말기도 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 ‘무덤 속에는 어차피 혼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고 따위 아직 덜 자란 이의 치기임을 깨달은 후, 나는 소통에 집착했다. 한 톨의 진심도 섞이지 않은 피상적 대화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나를 혼자 두지 않을 누군가, 아니 무언가의 존재가 절실했을 뿐이다. 이러한 감정은 그 어디에도 흘리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패배자의 감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안의 부정적 감정들 또한 토해내보기로 했다. 책해서 알려준 대로 나의 감정들을 글로 옮겨보며, 나의 행동과 말에 대한 상대방의 감정들을 유추했다. “불만족, 화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의 것”이라는 말이 마음 깊이 들어와, 나의 문제를 타인에게 전가하며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왔음을 깨달은 과정이었다.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인해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을 상대에게 전가함”으로써, 내게 상처 받고 떠나간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수용”하지 못해 외부적인 요인들에 책임을 돌리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나 자신과 마주했다. 책 속 말들과 나의 과거들을 연결시켜 날것의 나를 조우함으로써, 신기하게도 금세 후련해졌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한 수많은 이들과 엮일 것이다. ‘관계’는 필연적으로 소통이 뒤따른다. 소통에는 상처가 동반된다. 완벽하게 소통하는 법이란 없다. 나는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 받고, 누군가에게 상처 줄 것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최선이었던 선택이, 돌이켜보면 최악의 선택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실수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또 실수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성장하고 퇴행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럴 때면 문득 문득 이 책을 떠올리고자 한다. 내 안의 감정과 마주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와 타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기에 무조건적인 공감을 바랄 수 없음을, 타인과의 소통이란 두 사람 이상이 발 맞춰 나아가는 이인삼각, 삼인사각 경기와도 같다는 것을 이해하려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두 개의 갈대 다발은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