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유

by 레메디오스

출근길에는 좌석버스에 올라 창밖 풍경을 본다. 차보다도 빠르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고 있으면 아등바등 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것 같아 위안 받는다. 옷차림부터 머리 모양까지 제각기 다른 사람들 모두 오늘 하루의 모습도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다를 것이다. 단 하나 같은 것이 있다면 마스크다.


디스토피아 영화들에서나 보던 풍경이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핵 전쟁 이후 심각한 대기오염에 휩싸인 지구의 모습을 그린다. 화성으로 도피한 인간들의 남은 흔적마저 뒤덮어버리는 황색 먼지들은 화면 밖 관객들마저 호흡을 멈추게 한다. 영화 ‘괴물’도 비슷한 풍경을 그린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민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감싼다. 누군가 재채기를 하거나 침을 뱉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휩싸이는 사람들. 코로나 19는 영화 속 풍경들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코로나19가 일상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이를 단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마스크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의 일상은 항상 아이와 함께였다. 18개월 차에 접어든 딸은 ‘엄마, 아빠’를 곧잘 말하고, “이게 뭐야?”라고 물으며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표출한다. 어디서 배운 건지 때때로 “이게 뭐꼬?”라며 사투리를 말하며 웃음폭탄을 던진다.


이맘때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고역 중 하나가 아이와의 외출일 것이다. 아이가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신체의 편안함 따위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의 원피스에 굽 높은 구두, 비싸고 멋들어진 핸드백은 꿈도 못 꾼다. 움직이기 편한 티셔츠와 바지, 언제든 아이를 번쩍 들고 뛸 수 있는 운동화, 최대한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천가방이 기본 착장이다. 외투 안 입겠다며 엄마 손을 피해 뛰어다니는 아이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현관을 나서기도 전에 이미 모든 기력은 소진된 상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관문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마스크다. 이전까지는 제1차 대전만으로 모든 고난이 완성되었다면, 이제는 제2차 대전까지 추가된 것이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24개월 미만 영유아는 호흡기가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호흡 곤란 시 스스로 마스크를 벗지 못할 위험이 있어 마스크 의무 착용 대상이 아니’라는 정부의 권고를 접한 탓이다. 어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얼굴을 훤히 내놓고 뛰어노는 아이를 백안시하는 어른들을 마주하며 나는 움츠러들었다. 아이의 얼굴에 마스크를 들이밀며 강제로 씌우려 하는 어르신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는 것은 아동학대다’, ‘아이 건강을 등한시하는 이기주의다’라는 온라인 속 성토들에 섬뜩함도 느꼈다.


출근하거나 장을 보며 주변을 살피는 시간들이 늘었다. 아직 제대로 서거나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본다. 외출할 때면 아이들이 부모님들께 마스크를 내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의 무심함을 반성하고야 말았다. 남편도 그간 신경이 쓰였던지 우리 딸도 마스크를 씌우자며 권유하니 내가 백기를 들 수밖에.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다.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거나 바늘구멍에 낙타를 구겨 넣는 게 더 쉬울 것만 같다. 마스크를 얼굴에 가져다대면 도망가고, 비명을 지르고, 어쩌다 성공하면 벗어나려 안간힘이다. 어르고 어르며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아이 대 부모의 전투를 반복하며 나는 깨닫는다. 코로나19가 빼앗은 건 일상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쌓아갈 추억들이다.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불안한 세상은 여기 저기 모르는 곳들을 자유롭게 기웃거릴 탐험의 기회를 앗아갔다. 맑은 계곡물에 발목을 담그고 찰박이는 물의 감촉을 느낄 기회를 앗아갔다. 새로운 친구들과 자유롭게 만나고 친해지고 싸우고 헤어질 기회를 앗아갔다.


코로나19는 이제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숨을 내쉬고 내뱉을 자유까지 빼앗았다. 어른들이 세상을 주무른 대가는 이제 막 생을 시작한 아이들이 감내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저 작은 헝겊 덩어리들에게 무한한 증오를 느낀다. 세상을 배워갈 아이들에게 죄악감을 느낀다. 이는 생의 종반으로 달려가는 우리 어른들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세상이다. 언젠가는 마스크가 속박의 상징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변모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날이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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