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은 얼룩일 뿐이다.

by 레메디오스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錄.內.障. 눈에 익숙한 이 한자들을 한데 모아놓으니 낯설고 혼란스럽다. 푸를 록에 안 내, 막을 장. 푸르름이 속을 가린다니 이 얼마나 달고 청량한가. 그러나 속을 뜯어보니, 푸른 사과 속 숨은 벌레마냥 트적지근하다.

스마트폰을 켜고 검색해보니 “눈으로 받아들인 빛을 뇌로 전달하는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시야결손이 나타나는 질환”이라는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기껏해야 노화와 관련된 질병이라고만 여겨 흘려보냈던 이 세 글자가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뒷덜미를 낚아챈 것이다. 내가 나이를 먹었다고는 하나 아직 청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서른여섯. 질병과 사고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다지만, 나는 지독한 불공평함을 체감한다.


열 살도 되기 전 고도근시 판정을 받았다. 일요일 정오마다 KBS에서 방영하던 만화영화를 너무 집중해서 본 탓인지, 밤늦게까지 공포소설에 빠져 살았던 탓인지는 분명치 않다. 역력한 것은, 뺑뺑이 안경은 내 자신감도 뺑뺑하게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내 눈의 크기를 절반 이하로까지 줄여버리는 과학의 저주를 매일 경험하다보면 특히 청소년들은 극도의 우울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수업시간이고 등하교 시간이고 안경을 가방에 넣어두곤 보이는 양 연기를 해 온 이유다. 맨눈으로는 고작 한 뼘 앞의 사물들도 선명히 볼 수 없는 주제에, 때로는 보인다며 스스로의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면서까지. 물론 고집쟁이의 기행은, 고작 열 발자국 앞에 있던 돌덩이를 못 봐 밟고 넘어졌다가 제대로 발을 삐어버려 며칠 간 개고생하면서 종결됐다.


현대 안과기술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을 꼽으라면 나는 오직 콘택트렌즈만을 부르짖으리라. 사람을 죽여도 천국에 가야만 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하나는 초콜릿을 발견한 사람이며, 또 하나는 콘택트렌즈를 개발한 사람이라며 설파하고 다니는 게 나다. 대학교 입학 후 콘택트렌즈와의 만남은 내 인생 일대혁신이었다. 가끔은, 아니 꽤 자주, 콘택트렌즈를 꼈다는 걸 잊고 잠이 들어버릴 정도로.


30대 중반에 맞이한 청천벽력의 뿌리를 찾아보려 과거를 슬금슬금 거슬러본들, 재판관 앞에 선 도둑님의 감성팔이일 뿐이다.


큰일을 맞닥뜨린 현대인들의 특성. 스마트폰 들여다보며 자가진단하고 자가절망하다 자기분노하기. 스마트폰 속 군중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말한다. 부정적 가능성은 증폭시키고, 긍정적 가능성은 짓누르는 능수능란함에 사람들은 손쉽게 감정을 속아 넘긴다. 흰 바탕에 검은 얼룩을 떠올려보라. 흰 바탕이 아무리 넓더라도 사람들은 얼룩만을 더욱 크게 기억하는 법이다.


실명, 시야결손, 시야 손상…. 절망을 꾹꾹 눌러 담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꽉꽉 채워나갔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화마처럼 퍼져나갔고, 잠시 사그라지다가도 잔불이 피어올랐다. 나의 불행이 나와 관련된 모두에게 전염될까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비슷한 발음조차 내뱉기도 어려웠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가는 법이다. 비관과 낙담이 매 시간, 매 초마다 머릿속을 좀먹어가는 중에도 시간은 체념 없이 흐르고 흘렀다.


매트 위를 뒹굴며 놀기 좋아하는 딸아이를 위해 테이프 클리너로 매트 먼지를 빠짐없이 제거하고, 밥과 간식을 준비하고,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출근 후에는 정신없이 일하다 퇴근시간이 되면 지하철로, 버스로 내달렸다. 밥 안 먹겠다며 고집부리는 딸아이와 큰소리로 실랑이를 벌이다 비명 지르며 울어대는 딸아이를 꼭 껴안고 토닥이고, 뽀로로 피규어를 밟고 넘어졌다가 딸아이와 웃음을 터뜨리며 뒹굴기도 했다. 하루 한 번 마주치는 점안액만이 내 삶에 생긴 이물질의 존재를 깨우쳤을 뿐이다.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중 “엄마, 아빠”보다도 “꽃”이라는 말을 먼저 배운 아이가 무언가를 보며 동동거렸다. 무엇인가 싶어 다가가니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의 잎이 갈기갈기 찢기고, 꽃잎은 진흙으로 뒤덮여 있다. 아이고, 누가 밟았나보다. 딸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다가 깨닫는 것은, 꽃이 아직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이 토닥토닥해주자. 괜찮아. 괜찮아.”


딸아이가 고사리손으로 꽃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것을 보며, 나는 소리 없이 말을 건넨다.

그렇게 너도, 나도. 아무 일 없는 듯이 꾸준히, 열심히 살아가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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