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딴 생각 달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시간, 공간, 맥락 관계 없이 각종 ‘딴 생각 하며 딴 생각 안 하는 것처럼 보이기’ 기술의 자칭 1인자라는 것이다. 0에 수렴하는 집중력으로, 상대에게는 대략 90 정도는 되어 보이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경청의 만족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나의 정신건강을 수호하며 상대방의 자존감을 지켜낸다니, 이 기술이 널리 널리 전파된다면 세계 평화에도 긴히 공헌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기술이 특히 빛을 발할 때는 바로 ‘잔소리 현장’이다. 생각해보라. 우이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잔소리들을 마주하는가. 대체 이 잔소리란 무엇이냔 말이다. 나는 원치 않는데도 충고라는 명목 하에 쓸데없이 늘어놓는 말들, 갖은 의미로 포장하지만 상대방에게는 한 번 맛보고 지나칠 싸구려 시식 제품들만큼이나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들. “젓가락 제대로 잡아라.” “의자에 허리 붙이고 똑바로 앉아!” 등의 사소한 것들부터 “나 때는 말야.”라는 말로 대표되는 ‘인생 상담’, ‘취업 충고’…. 이런 잔소리들은 희한하게도 발화자의 우월감과 함께 다가온다. 자신의 그 말들이, 충고가, 조언이, 상대방의 발전 혹은 ‘개선’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잔소리의 교화 기능’이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물론 진심어린 걱정이 담긴, 심지어 유용한, 경험 기반의 충고들이 아예 없다며 선을 긋지는 않겠다.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혜들에 귀를 막고, 무조건적인 방어와 외면, 거부를 펼치려는 것 또한 아니다. 견고한 방어막을 세워 이들로부터 차단하려는 생각도 없다. 다만 어떤 (혹은 대다수의) 잔소리란 것들은, 화자-청자 관계에서 청자보다는 화자 자신의 기분에 따른 분노와 짜증의 표출 수단, 화자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심지어 그 충고들 중에는 시대착오적인 것들도 여럿이라, 100km 거리의 비포장도로를 1시간 내내 달려야 하는 이에게 인력거나 마차를 타라고 우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굳이 덤으로 따라오는 거드름도.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설픈 실력으로나마 아이를 먹여보겠다고 열심히 초무침을 버무리던 날의 일이다. 고춧가루로 버무려보려는 내게, 초무침은 반드시 고추장으로 해야 맛이 살아난다며 우겨대는 어르신이 있었다. 애써 웃는 얼굴로 “다음번엔 꼭 말씀해주신 대로 해 볼게요.”라고 이야기함에도 즉각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불만인 듯 끝끝내 혀를 차고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길을 가다 새똥 맞은 듯 찝찝한 기분에 온종일 시달렸다.
이러한 사례들은 너무도 빈번하다. 선풍기 틀고 자면 죽는다는 ‘미신’을 맹신하며, 선풍기를 틀고 자려는 이를 마치 신종 자살미수자 혹은 살인자 보듯 보는 사람들, 내비게이션의 알람을 무시하며 끝끝내 ‘전문가인 내가 선택한’ 지름길을 고집하다 20분이고 30분이고 늦어 불쾌한 기분으로 늘어난 택시비까지 감당케 하는 사람들, 여기에 혹여라도 반박하면 나는 감히 어르신에게 말대꾸를 한 파렴치한 젊은이로 전락하고 만다. 논리적 대화, 온화한 상호 소통의 실현이란 유니콘의 재림에 다름 아니다. 덕분에 나는 아수라 백작이 되었다. 앞에서는 상냥히 웃으며 상대방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도, 뒤로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 청개구리 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어줘야 하는 관계에서, 진정한 소통과 수용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래의 잔소리라고 불쾌함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구, 또래라는 공감대가 무례함이라는 민낯으로 탈바꿈할 때,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격렬한 모멸감과 경멸을 느끼기도 한다.
최근에는 SNS의 성행 탓인지, 삶의 방식에 대한 조언들이 일상을 침범한다. 20대라면 이렇게, 30대라면 이런 것들은 있어야, 돈 관리는 저렇게, 취미는 이렇게, 주식은, 경제는…. 물론 진심으로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자 안달인 경우도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자신의 성공, 혹은 다소의 앞지름을 핑계로 타인에게 거드름 피우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면 내가 지나치게 삐딱하거나 지친 탓일 게다. 혹은 자격지심에 점철된 이의 넋두리일지도 모른다. 요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피곤하다는. 그러니 결국, ‘잔소리’라는 단어 외에는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저 상대에 대한 믿음과 존중으로 가득찬 사회를 원한다면, 너무도 이상적인 것일까. 저마다의 경험과 삶의 방식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은 진정 불가능할까. 왜 ‘맞는 방향’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방향’은 ‘틀린 것’으로 치부하는 것일까. 정답만이 인정되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 규격화된 삶으로부터 함께 탈피하는 것은 힘든 일일까.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삶의 갈래를 함께 개척하고 인정하는 것. 정녕 이루어지기 힘든 바람일까.
그래서, 딴 생각 달인의 비결이 뭐냐고? 사실은 별 거 없다. 시선은 상대방의 인중으로, 고개는 끄덕끄덕.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끝말을 맞장구. 그리고 무엇보다, 뻔뻔할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