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앞에 놓아보는 짧은 이야기
영화연출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Peter Hughes 라는 호주에 있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티스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일본인 친구를 도와 촬영감독을 한 적이 있다. 연출을 맡은 그 친구가 졸업한 뒤 '민들레의 집'에서 장애인의 예술활동과 관련된 단체에서 일한다는 것을 듣고 궁금하여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단체를 만든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호기심이 일었다. 당시 나는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소위 '충무로' 감독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며 개인 캠코더 장비를 구입해 시민단체, 유네스코 같은 기관 등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다큐와 짧은 유튜브 영상을 만들던 때였다. 당시 내게는 카메라, 다큐멘터리가 내가 궁금한 것,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매개체였고 그래서 '민들레의 집'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수 있을지 문을 두드렸다.
출발 전 보냈던 기획안과 임직원 분들 앞에서의 프리젠테이션을 거쳐 나는 3개월간 단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면서 촬영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도 없는 외국인 대학생에게 3개월씩이나 머물며 자신을 촬영하도록 허락해준 단체의 임직원 분들께 감사한 마음 뿐이다.
이 기간 동안 나는 내가 장애인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해본적이 없었다. 대신 정말 다양한 개성과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고 그것이 존중받는 곳. 그 안에서 당시 여러 의미에서 방황하는 나도 받아들여지고 해방감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고 졸업한 뒤 이런저런 장애예술 관련 기획일을 맡다가 로사이드라는, 2021년 현재는 잇자잇자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장애예술단체에 2012년부터 2019년 무렵까지 대표자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이름을 올리고라는 말을 쓴 것은 일정 시점까지 로사이드는 비슷한 경력의 예술가들이 공동대표 개념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로사이드 당시의 경험과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은 지금 내게 가능한 일은 아니고 이 글도 그런 회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영상보다는 주로 운영 업무를 맡았고 특히 기업 후원이 끊긴 후반부는 돈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통해 영상을 만들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은 시간들이다.
2021년 3월, 미디어필링을 시작했습니다.
미디어필링은 발달장애인을 다루는 미디어가 부족하고 있더라도 그 사람의 온전한 개성과 매력을 잘 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미디어필링의 비전을 소개하는 말과 결과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영상콘텐츠는 현재 열심히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브런치에 올리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 이렇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해두고 소통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