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일기 20032023
11월 셋째 주 목요일은 하나 같이 공부에 진심인 대한민국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날이죠. 학생들이 문제 푸는데 방해될까 비행기 이착륙 시간도 조정하고, 교사분들은 수능 감독관으로서 학생 못지않은 부담을 갖고 파견 가시고, 학생들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내 차례에 정신없이 하루를 준비합니다.
누구는 수능날 어느 학교에서 시험을 쳤는지, 점심 도시락으로 뭐 먹었는지, 문제가 어땠는지 생각도 안 난다고 합니다. 근데 저는 아직 생각만 하면 2021년 11월 18일로 돌아갈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 생생해요.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겠어요?
제가 1학년일 때는 수능 전날에 3학년 선배분들이 수험표를 받고 하교하는 길 양쪽에 1~2학년 재학생들이 반별로 줄을 서서 박수를 쳐주고, 간혹 몇몇 분들은 마지막이라는 것이 그때 실감 나서인지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셨죠. 사물함에서 물건을 비우는 날이기도 해서 양손에는 차마 가방에 다 넣지 못한 EBS 연계 교재를 안고 손등으로 대충 눈물을 닦고 마지막 하굣길을 걷습니다. 모두가 그 마음을 알기에 울어도 더 큰 박수로 응원하고, 옆에 같이 걸어가는 친구들이 어깨를 토닥여주는 분위기였어요. 지켜보는 입장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2년 뒤 이 날에 저 길 위에 서있을 사람은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박수를 치고 이제 교실로 들어가도 된다는 선생님의 신호가 오면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하늘을 괜히 한 번 올려다보고 들어갔죠.
수능 당일은 학교 선생님들도 파견 가셔서 수업 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1~2학년 재학생들은 애매한 휴교일을 맞이합니다. 자연재해 때문에 몇 년에 한 번 하는 휴교와는 전혀 다르게 잠깐 쉬려 해도 죄책감이 몰려옵니다. 뭔가 쉬면 안 될 것 같아요. 몇백 일 뒤에 내가 이 시간쯤에는 덜덜 떨면서 국어 그나마 쉬운 선택과목부터 풀고 있을 것 같고, 30분 쉬었다가 100분 동안 수학 문제를 달리고, 점심에 엄마가 싸준 도시락 먹고, 영어는 듣기 할 때 독해 ‘와리가리 스킬’하면서 실수하지는 않을까 싶죠. 한국사에 잠깐 쉬어가면서 바로 다음에 칠 탐구 개념 머릿속으로 복습하고, 탐구 30분씩 거저 주는 개념 문제 빨리 풀고 확보한 몇 분도 부족해서 쫓겨 가면서 킬러 문제 해결하는 그림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불편한 휴일에 인강 교재를 펼치고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앗!’ 11월 말까지만 올해 프리패스가 유효합니다. 겨울방학 전에 또 내년 프리패스를 사야겠네요.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시간은 흘러갑니다. 사이트에 ‘D-Day’라고 적힌 것은 올해 수능이 끝나자마자 ‘D-364’로 누구보다 빠르게 바뀌어 있습니다. 그렇게 ‘이제 나의 차례’가 다가왔습니다.
제가 고3일 때는 코로나19가 심할 때라 수능 1주 전부터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학교에서 수험표를 나눠주는 날에만 등교를 했는데요. 학교 건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정문 앞에서 제 수험표가 든 봉투와 수능장에서 먹을 간식을 받았습니다. 봉투를 열고 제가 수능을 칠 학교와 홀/짝수형을 확인할 때의 떨림도 아직 느낄 수 있습니다. 집에서 아주 먼 학교가 걸렸다는 실망을 한 번, 그리고 다행히 홀수형이 걸렸음에 안심을 백 번 했죠. 뒤집어서 뒷면에 붙은 가채점표도 확인했고요. ‘예비 소집일’이라는 이름이 애매한 것이 당시 시험장 앞까지는 위치 확인한다고 갈 수 있어도,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미리 공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운전하시는 부모님이 퇴근길에 시험장에 다녀온다고 하셔서 학교 이름을 어머니께 보내드리고, 저는 집으로 빨리 돌아와서 짐을 챙겼어요.
수능장에서 제공하는 필기구는 매년 비슷한 디자인에 색상만 살짝 바뀌고 ‘20xx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구가 적힌 수능 샤프 한 자루, ‘20xx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생용’이라는 비슷한 문구가 적힌 컴퓨터용 사인펜 한 자루(예비 마킹용 플러스펜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수능날 예비마킹은 절대 절대 금지입니다. 대신 화이트로 신중히 지울 수는 있죠. 학교 내신 시험은 답안지 오류가 있을 때 선생님들께서 화이트를 쓰셔서 화이트가 금지고, 예비 마킹을 하거나, 그래도 검은색을 마킹할 때 실수했다면 답안지 교체를 하도록 하죠. 하지만 수능과 학교에서 치는 모의고사는 예외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예비 마킹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사소한 규정에 미숙하면 본인만 피눈물 흘리며 손해 봅니다.)이 전부입니다. 불량품일 경우에 감독관을 통해 교환이 가능하죠. 화이트는 각 시험실 별로 몇 개씩 감독관분들이 들고 계시긴 해요. 하지만 수능날 내가 불량품이 걸려서 바꾸고 싶거나,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화이트를 빌리고 싶거나, 화이트로 지우고 다시 쓰고 답안지가 엉망이라 바꾸고 싶다면? 남들도 그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잘 깎은 개인 연필 여러 자루, 쓰던 지우개랑 똑같은 새 제품 하나 더,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예비 마킹을 할 수 있으니 아예 플러스펜이 없는 검은색 컴퓨터용 사인펜 여러 자루, 개인 화이트 한 개나 조금 오버해서 두 개(너무 많이 가져가도 제가 학교에서 모의고사 칠 때 경험한 문제는, 나도 인생이 걸린 시험 연습 중인데 감독관분이 시험장에 화이트가 부족한데 옆에 애 화이트 빌려줘도 되나고 물어보시면 거절하기도 뭐하고 대답하는 동안 자잘한 시간 뺏겨서 괜히 시험에 방해됩니다. 물론 수능 당일 감독관 선생님들은 다 좋은 분들이셨어요.) 등은 챙겨 가시는 게 좋습니다.
개인 샤프나 볼펜은 소지가 금지되기 때문에 수능이 가까워지면 수능 샤프를 납품하는 업체에서 시중에 파는 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구매하거나 여분으로 들고 가도 되는 연필을 사용해서 시험장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학생들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바로, 시험장 반입이 가능한 ‘아날로그 시계’입니다! 시험장이 학교 교실이니 여러분이 공부하던 교실에 하나쯤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시계를 들고 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시험 중 유일하게 시간을 알 수 있는 때는 시험 10분 전 마킹을 권유하시는 감독관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1교시 예비종이 치고 감독관분들이 일찍 들어오셔서 필기구부터 나눠주는 때에 어떤 학생은 수능장에서 지우개도 주는 줄 알았다고 수험생 유의사항 확인도 안 한 티를 대놓고 감독관분들께 내는 황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최저 학력 기준 없는 수시에 합격한 학생이라면 다행이지만,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향성을 결정하는 하루에 본인의 부주의로 시험을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완벽히 갖춰진 조건 하에도 실수는 나오기 마련이기에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저런 학생이 시험장에 하나만 나와도 주변에도 엄청난 민폐입니다. 감독관분들도 저런 학생한테 할 수 있는 조치로 딱히 정설인 것이 없어 난처하실 거예요. 그리고 앞서 서술한 화이트 사건처럼 여분의 지우개가 있는 학생한테 ‘얘가 지우개가 없다는데 조금 잘라주거나 아예 하나 빌려줄 수 있어요?’라고 대신 양해를 구하는 방법을 보통 선택하실 겁니다. 누구나 어지간해서는 교실 내에서 해결하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괜히 같은 교실에 있는 학생들만 힘들어지죠. 내가 어제 생각했을 때 수능장에서 어떤 변수가 생겨서 나를 당황하게 할까 싶어서 넉넉하게 챙겨 온 물건들인데, 이제 국어 문제 풀려고 한창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저런 부탁을 받는 것도 당황스럽죠. 대답을 뭐라고 할까 고민하는 것조차 시간 아깝고, 왜 하필 내가 있는 고사실에 저런 수험생이 같이 있나 싶은 생각도 자연스레 듭니다. 하필이면 몰입감 깨지게 말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빌려준다 해도 ‘내가 오늘 시험 치면서 저게 부족하면 어쩌지? 돌려받기도 애매하고…’ 신경 엄청 쓰이죠. 그냥 안 빌려준다 얘기하는 것이 상책 같습니다. 수능날에는 내 인생이 걸린 시험이니 남한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이기적이어도 됩니다. 배려를 요구받아 거절하는 것은 본인 잘못이 전혀 아니니 뭐라 할 사람도 자격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렇게 본인 부주의로 생긴 문제인데 남한테 빌려달라고 당당히 해결하려는 것이 염치없는 행동입니다. 나를 위해서도, 어찌 됐든 하루 동안 같은 교실을 써야 하는 수험생들한테 피해를 안 주기 위해서라도 수험생 유의사항을 꼼꼼히 확인해서 따르도록 합시다. 물론 이 글을 찾아 읽을 정도로 부지런한 독자분들은 당연히 규정을 잘 확인하고 지키는 분들이라 믿습니다!
가채점표는 어디까지나 수시와 정시로 갈 수 있는 대학을 비교해서 전략적인 선택을 하기 위함이므로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푸느라 정신없다면 OMR 마킹에만 집중하도록 합시다. 마지막 능력까지 쥐어짜듯이 문제를 풀어 본래 수능성적표를 좋게 받으면 됩니다. 가채점표를 작성 못했더라도 조금이나마 대체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마지막 교시까지 잘 치르고 저녁때 집에 와서 EBS에 공개된 문제지 파일로 복기하며 내가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지 메모해놓고, 바로 옆에 있는 답안지 파일로 대략적인 채점을 하면 됩니다. ‘가채점의 가채점’이라고 할까요? 뭐 어쩔 수 있나요. 아쉬운 대로 주어진 것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죠.
실제로 제가 현역으로서 치른 2022학년도 수능은 특히 국어 영역이 불수능이라 불렸습니다. 제가 예비 고1로서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 치러진 2019학년도 수능에서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한 ‘만유인력’ 문제가 화두였기에 고입 때부터 경각심을 가지고 준비했었음에도 정말 어려웠습니다. 내가 수능장에서 직접 푼 문제가 아니라면 ‘뭐 이 정도 가지고 어렵다 하냐. 나는 잘 풀리는데?’라고 쉽게 말해선 안 됩니다. 당시 저는 시험장에서 OMR 답안지를 먼저 배부받아 인적사항 마킹을 하고 시험지가 넘어와서 ‘인적사항 마킹만 하고 아직 시험지 펼치지 마세요.’라는 감독관의 지시를 받고 긴장 속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에 보이는 올해 수능의 필적 확인란 문구에 뭉클해집니다.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이거, 이거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밈으로 돌아다닐 것이 분명합니다. 출제진이신 분들의 의도는 난생처음(저처럼 올해 여러 번일 수 있지만, 매년 더 긴장되는 것은 맞으니) 맞는 긴장에 떨고 있는 학생들에게 긍정과 희망을 가득 주고 싶으셨겠죠. 처음에는 이 문구를 보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표지를 펼치기 전까지만요.
그다음 ‘이제 시험지 펼쳐서 인쇄 오류 있는지만 빠르게 확인하고 덮으세요.’라고 말씀하셨을 때, 빠르게 오류 확인을 하면서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온’ 비문학 부분 시험 문제를 보자마자 ‘이번 국어는 시간이 절대 부족하겠구나.’라고 직감했습니다. 어려우라고 낸 과학/기술 제재의 <보기> 문제로 추정되는 것에 그림까지 그려주며 서술해 놨으니 ‘이렇게 그림으로 보충 설명해줘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려워서 풀지도 못한다.’는 깊은 뜻이었겠죠. 나중에 시험 시작종이 울리고 평소처럼 제가 선택한 ‘언어와 매체’ 부분의 11문제를 먼저 풀었습니다. 쉬운 문제도 있었으나 이상하게 시간이 기출문제를 풀던 때보다 훨씬 더 드는 겁니다. 그때부터 꼬이더니 문학 선지 판단도 몇 개 애매해서 처음 생각한 선지로 체크는 해놓되, 별표를 치고 비문학으로 넘어갔습니다. 근데 저는 별표를 칠 때부터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시간은 없겠구나…’를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나마 덜 어려운 철학 제재 지문으로 갔죠. 갔더니 역시 이것도 거저 주는 문제는 아닙니다. 철학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렵게 내려면 ‘논리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거듭한 무한 부정’으로 햇병아리 학생들을 헷갈리게 하기는 충분하죠. 머리가 어질어질, 시계 초침만큼 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으면 싶죠. 그렇게 혼란스럽다가 정답 선지는 억지로 골라서 ‘차라리 과학/기술 지문이 명쾌하겠어.’라고 넘어갔더니… 처음 시험지 파본 검토할 때 했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감대로 지난 9월 평가원 모의고사보다 매우 어렵습니다. 차라리 철학 지문이 천사였죠. <보기> 문제에 그림을 준 것도 직접 지문을 보니 출제자분들의 깊은 뜻이 맞았습니다. 하… 하하하… 머릿속에 ‘+1’ 생각이 간절합니다. 근데 1년 더 해도 이걸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아니 저는 이과로 전과했기 때문에 1년 더 하는 것이 확실한데도 해답은 ‘+1’밖에 안 보입니다. 문제의 답보다 확실한 사실이 딱 하나가 있죠. 이것은 재수입니다.
나중에 재수할 때, 현역 시절 수능 지문을 기출문제집에서 풀어보니 과학/기술 지문 제재가 ‘운전자에게 차량 주위 영상을 제공하는 장치의 원리’라고 나와 있었는데요. 제가 11월 18일 저 지문을 봤을 때 했던 생각은 ‘이건 내가 면허가 있어서 운전에 익숙하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다.’였습니다. 분명히 그날 수능을 친 분들 중에 면허가 있는 n수생 분들이 꽤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능 국어는 배경지식 싸움이 아니죠. 그래도 긴장되는 시험 속에서 지문이 친숙한 느낌을 주면 살짝 편해져서 머리가 유연 해지는 때가 있는데요. 이게 그때 수능에서 큰 도움이 안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워도 적당히 어려워야죠. 어려워도 신라면이라고 생각했는데 불닭볶음면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내년에는 내년 수능이 열립니다! 다음 교시는 다음 과목이 시작되고요. 오전 10시 정각에 종이 울린 순간부터 올해 국어는 머릿속에서 지워야 합니다. ‘내년 메가스터디 프리패스 얼마나 할까?’하는 걱정은 아직 이릅니다. ‘엄마 미안해…’하고 짐 챙겨서 퇴실하면 안 됩니다. 혹여 올해 수능으로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진짜 수능 시험장 경험은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1년에 딱 한 번만 할 수 있습니다. 모의고사로 대체 불가할 정도로 진귀합니다. 제발 뭘 어떻게 풀어도 좋으니 n수 시뮬레이션이라 생각하고 앉아는 계세요. 하다못해 점심 도시락 싸들고 모의고사 치는 소풍을 왔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서 오히려 문제가 잘 풀립니다.
‘이건 한 번만 열리는 시험도 아니고, 실패해도 내 인생이 영영 끝나지 않는다. 그냥 시험장 견학이다. 나는 잘한다. 잘한다…’
쉬는 시간은 명목상 30분이지만, 감독관 분들은 10분만 있어도 들어오십니다. 화장실 갈 사람은 다녀오되, 다음 교시를 위해 차분히 앉아서 마음을 정리하라고 하시죠. 그리고 교탁 옆에 보통 쓰레기통 놔두는 자리 아시죠? 수능날은 거기에 수험생들의 가방 전체를 모아 둡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복기하려고 힘들게 많이 챙겨가도, 미리 시험지가 배부되기 전 아주 짧은 몇 분 동안만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다 들고 가야 마음이 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직접 볼 자료는 A4 몇 장 정도만 챙겨가세요. 명심하세요. 길어도 20분 내외인 애매한 시간입니다. 두꺼운 책은 다 볼 수도 없고, 여기저기 펼쳐서 찾는 시간도 아까워요.
국어 시간에 용암에 한 번 담갔다 뺀 내 머리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가장 중요한 그분이 오셨습니다. ‘2교시 수학 영역’입니다. 수능 성적에서 중요도를 개인적인 비유로 조심스럽게 표현해 보자면, 온몸으로 대학 정문을 향해 달리기를 한다고 가정할게요. 수학이 머리로 대학 정문에 박치기를 하고, 국어가 멱살 잡고 이끌고, 탐구가 다리를 열심히 굴려줘야 하며, 영어가 역풍이 불지 않는 정도의 절대평가 등급으로 양팔을 흔들어 주고, 한국사나 제2외국어는 내가 대학 문턱을 넘는 마지막 순간에 발목을 잡지 않는 정도면 됩니다. 수학이 대학 정문을 부수는 든든한 머리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세요. 그만큼 범위도 넓고, 그렇다고 무지성 암기로 커버할 수 없이 많은 생각을 필요하니 응용력이 중요하기에 열심히, 아주 열심히 두뇌를 폭발적으로 벌크업시켜야 합니다. 오죽하면 ‘이과는 전체 공부가 10이면 수학이 9, 나머지 1에 국어, 영어, 탐구 2과목을 다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을까요?
1교시처럼 OMR 답안지와 시험지를 받아서 파본 확인을 합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1번 문제부터 수상합니다.
‘설마 1번을 계산하기 복잡하게 냈겠어?’
시작종이 울리고 신문지 촤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시험지를 펼쳤더니 세상에… 1페이지는 거저 주는 문제로만 알았는데, 제가 다른 차원에서 모의고사를 봤나 봅니다. 지수 법칙 계산하는 1번 문제는 원래 해봐야 지수끼리의 덧셈과 뺄셈인데, 이번에는 루트 곱셈에 덧셈입니다. 아는 문제인데 굳이 복잡하게까지 나오니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도대체 킬러는 얼마나 어렵게 냈길래…’
잊고 있었습니다. 2022학년도 수능은 최초의 문/이과 통합 수능으로 어떻게 하든 난이도 조절이 힘들다는 것을. 몇 년 전부터 킬러 3개를 엄청 어렵게 내기보다는 준킬러 7개를 예전 킬러보다는 살짝 덜 어렵게 내서 변별력을 갖는 기조였습니다. 근데 왜 저만 그냥 예전 킬러 7개 같죠? 7개는 좀 아니고, 5개 정도? 아무튼 저는 현역 때 확률과 통계를 했는데요. 해보신 분들 무슨 느낌인지 아실 겁니다. 확통은 해설지를 보기 전까지 본인이 틀리게 풀었다는 것을 제일 알기 힘든 영역이죠. 경우의 수를 잘못 가르면 터무니없이 큰 숫자가 나오죠. 근데 이거 공통이 만만치 않습니다. 확통으로 넘어가면 국어 비문학처럼 시간이 엄청 부족한 상태에서 쫓기듯이 풀어야 할 것 같죠.
‘내년부터는 나도 선택 미적분으로 쳐야 하는데 어쩌지?’
마법처럼 100분이 사라졌습니다. 어지러운데 점심시간입니다. 아직 두 영역밖에 안 끝났으니 살아남으려면 꾹꾹 눌러 먹어야죠. 그래도 중요도가 가장 큰 두 영역이 끝났으니 마음이 편하면서도 공허함이 몰려옵니다. 마침 시험장 환기 때문에 창문이 열리죠. 어찌 공기보다 내 마음이 더 시립니다. 각 시험실 문 앞에 감염 확산 방지용 칸막이가 도착하지 않아서 점심 도시락을 아직 먹으면 안 된다는 안내가 나옵니다. 빨리 먹고 탐구 개념이나 좀 더 보려 했는데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칸막이가 왔다고 해서 받으러 갔는데 살짝 딱딱한 박스를 삼면으로 접은 형태입니다. 이거 받으려고 5분은 더 기다렸습니다.
와중에 어머니가 빨간 소고기 뭇국에 불고기와 계란말이를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셨는데, 케첩도 랩에 조금 싸주셨습니다. 시험지를 계속 만져서 건조한 손가락으로 랩을 풀고 보온 도시락 뚜껑을 하나씩 여는데 마음이 조급해지죠. 그래도 먹어야 하니 차분히 상을 차려서 밥을 국에 적셔서 후룩 삼킵니다. 수능날 죽을 먹으면 탐구칠 때 화장실 가고 싶고 허기지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기에, 시험 중에 배고프지 않도록 불고기와 계란말이를 꼭꼭 씹어 넘깁니다. 다 먹었으니 서둘러 도시락 용기를 원래대로 정리합니다. 화장실도 빠르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양치질하는 학생들 때문에 줄 선다고 손 씻는데 한참 걸립니다. 양치 물고 있으면서 정답에 관한 토론을 왜 옹알이로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착한 수험생은 다음 빌런들의 담화를 평소 학교 점심시간에 하듯이 수능장에서 따라 하지 마세요! 저도 참, 메가스터디 수강생들도 이런 건 안 따라 한다고요.(이거 알면 지금 수능 칠 나이입니다.)
‘야아앙, 어까 햑통 댬딥번 댭 모야?’(야, 아까 확통 30번 답 뭐야?)
‘아? 몬라. 띡어써.’(아? 몰라. 찍었어.)
‘입에 양치 물고 말할 시간 있으면 눈치껏 빨리 닦고 끝내서 비켜주지.’라는 생각은 접고 침착히 다시 자리로 와서, 내신 시험을 준비할 때 과목 순서를 거꾸로 봤던 것처럼(예로 3일 동안 시험을 치면, 시험 직전 3일은 3일 차에 치는 과목, 2일 차, 1일 차… 이렇게 보는 것이죠.) 탐구 제2선택과목의 개념부터 총정리합니다. 제1선택과목은 영어 영역이 끝나고 또 시간이 있으니 부족하면 그때 이어서 보면 됩니다. 한 문장에 매료되면 안 되니 목차를 훑어보듯이 단어 위주로 빠르게 복기합니다. 시험 직전에 기억을 되살려주는 매개체의 역할만 하면 됩니다. 사실 학습적인 효과보다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 뭐라도 하는 것이죠.
점심시간이 끝나고 3교시 영어 영역 감독관 분들이 들어오셨습니다. 다시 수험표 검사와 시험지 배부가 이어집니다. 답안지에 인적사항을 계속 적다 보니 이제 그마저도 익숙합니다. 상대평가 시절에는 영어도 실수해서 듣기 한 문제 틀리면 점수는 똑같이 2~3점이니 독해를 다 맞아도 등급이 달라지는 불상사가 생겼기 때문에 학생들이 듣기가 끝나면 독해를 하도록 추천받았죠. 하지만 절대평가인 지금은 상위권 학생들이라면 대부분 전문용어로 ‘와리가리’를 칩니다. 듣기 17문제(마지막 16~17번은 한 지문을 두 번 들려주는 문제) 중에서 넉넉히 3~4문제를 제외하면 계속 듣고 있을 필요가 없는 부분이 생겨서 비교적 쉬운 독해 지문을 잉여 시간에 끝내 놓는 고도 전략입니다. 쉬운 문제 푸는데 왜 고도 전략을 쓰냐고요? 독해에 매몰되어 잠깐 한 문제 못 듣고 점수 까이면 나중에 고난도 문제에서 틀려도 되는 점수가 확 줄어들기 때문이죠. 모든 고난도 문제를 다 살려야 90점인 1등급 컷을 맞출 수 있는 부담이 생기는 겁니다. 와중에 끝까지 들어야 하는 듣기 문제들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 번째로, ‘달러 계산’입니다. 2~3종류의 물건이 각각 얼마이고, 뭐를 몇 개씩 살 것인지 시험지에 간략히 메모해야 하고요. 현실 반영이 너무 잘 되어서 물건들의 최종 값이 쿠폰, 멤버십, 카드 할인에 따라 일정 금액 뺄셈 또는 퍼센트로 곱셈 등 간단한 산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뭐 하나 못 들으면 5개 선지에 적인 금액 중 내가 계산한 답이 하나도 없는 불상사가 터집니다. 그러면 일단 별표 치고 넘어가서 독해 문제를 다 푼 이후에 돌아와서 2교시 수학 영역 때 썼던 경우의 수를 계산 능력을 발휘해야죠.
‘자, 내가 무슨 물건을 선택했는지는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어. 여기서 할인 종류가 첫 방문 5$ 할인/멤버십 카드 10% 이렇게 두 개 맞지? 5$ 할인 들어갔으면 80$인데… 선지에 있다! 멤버십 카드까지 10% 할인을 넣으면 72$… 근데 선지에 없어. 잠깐 저렇게 계산할 때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아서 저 두 할인이 순서가 바뀌면 값이 달라지는데, 85$에서 10% 할인이면 소수점 계산이니까 지금은 선지에 없고. 그러면 80$가 맞을 거야. 믿고 넘어가자!’
예, 보기만 해도 생각하려니 복잡하죠? 그래도 인생이 이거 하나로 달라질 수 있으니 저런 문제에 직면하면 마지막까지 착즙해야 합니다.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본능적으로 달려들게 되어 있어요.
끝까지 들을 필요가 있는 두 번째 문제는 다른 문제들보다 난이도가 떨어지지만, ‘다음 그림 중 언급한 내용과 다른 부분’입니다. 눈으로 계속 보면서 귀에 들리는 정보와 다른 부분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쉬워도 독해와 병행하는 것을 멈춰야 해서 까다롭죠. 예를 들어, 그림에 어떤 공간 하나가 나오고 인테리어 소품들에 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 조명, 카펫, 소파, 의자 등 그림만 봐서는 어떤 부분이 다른지 지문을 듣기 전까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카펫 무늬가 체크인데 지문에서 단조로운 흰색이라고 하면 이 문제의 정답인 식이죠. 그나마 다른 문제에 비해서 선지 1개 정도 놓쳐도 살아날 구멍이 있는 문제입니다. 나머지 4개만 일치한다면 찝찝해도 내가 못 들은 딱 하나가 여집합 때문에 정답이 되기 때문인데요. 운이 좋으면 못 듣고 바로 다음 선지부터 정신을 차렸더니 그것이 정답이라서 바로 읽던 지문으로 돌아가면 될 때도 있죠. 정답이 3번이면 학생들이 다음은 듣지도 않고 체크하고 넘어가서 눈치로 푸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마지막 듣기 세트로 구성된 16~17번입니다. 한 사람이 꽤 긴 지문을 읽어주는 형식인데요. 16번은 주제가 무엇인지, 17번은 5개 선지에 나온 단어 중 담화에서 언급하지 않은 하나가 무엇인지 고르는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풀 때 순서를 바꿔서 풉니다. 담화를 들을 때, 17번 선지 중 언급한 단어는 지우면서 답이 쉽게 나옵니다. 끝까지 듣고 주제를 파악하고, 16번에 어떤 선지로 구성되어 있는지 비교하면서 가장 적절한 선지를 고르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으로 풀 때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7번 답을 결정해놨기 때문에 두 번째로 들려줄 때, 더 안 듣고 바로 독해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2. 담화에서 주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할 때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 독해 문제를 풀 때처럼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3. 도입부에서 주제가 결정되지 않고 끝까지 들어보면 화제 전환이 일어나는 경우 초반에서 억측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4. 답은 결정했으나 혹시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도 확인차 한 번 더 들을 기회가 생기고, 그때 두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는 압박이 문제 번호 순서대로 풀 때보다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듣기 할 때 푸는 독해 지문들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시간만 있으면 반드시 맞힐 수 있는 문제’가 되겠죠. 순서는 사람마다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저는 시험지 구조를 활용해서 ‘25번 도표 문제’부터 풉니다. 수능 시험지는 신문지 구조이고, 영어는 총 8페이지라서 문제지 2장과 겉표지 1장으로 3장이 배부되죠. 같은 종이에 인쇄된 페이지로는 1, 2, 7, 8페이지 한 장, 3, 4, 5, 6페이지 한 장이죠. 1페이지에 듣기 1~11번으로 가득하고, 2페이지에 듣기 12~17번이 왼쪽 한 줄, 18~20번이 오른쪽 한 줄에 배치되어 있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듣기가 시작되는 순간 2페이지로 넘겨서 편지 형식인 ‘18번 글의 목적’부터 풀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풀다 보니 시험지를 한 손에 쥐고 계속 넘겨 가며 왔다 갔다 하니 불편했습니다. 듣기 답 하나 체크하고 읽던 지문으로 다시 올 때 흐름의 단절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죠. 그래서 생각한 방식이 같이 접혀서 겹쳐진 시험지 두 장을 분리해서 각각 두는 것입니다. 1, 2, 7, 8페이지는 접힌 방향 그대로 놔두고 왼쪽에 둡니다. 그리고 3, 4, 5, 6페이지는 4, 5페이지가 바깥으로 오도록 원래 접힌 방향의 반대편으로 직접 접어서 오른쪽에 둡니다. 이렇게 하면 4페이지에 간단한 내용 일치 문제인 25~28번을 종이를 넘기지 않고 풀 수 있습니다. 종이를 넘기지 않아도 지문이 눈에 들어오니 몇 단어라도 더 읽을 수 있습니다.
듣기는 아직 1페이지인데 4페이지의 문제를 다 풀었다면 어디로 갈까요? 1페이지가 여전히 위로 오도록 종이를 펼치면 왼쪽에 8페이지, 오른쪽에 1페이지가 놓이죠. 43~45번 장문 독해 한 세트를 끝낼 수 있습니다. 43~45번은 보통 일상 사건 하나를 중심으로 지시 대명사 불일치, 문단 배열 순서, 단순 일치 여부를 묻기 때문에 쉽고, 이때 풀어놓으면 고난도 순서 삽입/빈칸 추론 문제들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생깁니다.
45번까지 풀면 보통 듣기 순서도 2페이지로 가야 할 때가 됩니다. 그러면 18~20번은 2페이지에 남은 듣기 6문제를 풀면서 해결하면 됩니다. 이때도 종이를 넘겨가며 풀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죠. 18번은 글을 쓴 목적을 묻는 문제인데요. 뒷부분에서 부탁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반전이 일어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19번은 제시된 사건에 따른 심경 변화를 묻기 때문에 중간에 듣기를 하다가 와도 흐름이 덜 끊기죠. 20번은 주제 찾기를 조금 쉽게 낸 문제라서 역시 부담이 덜할 겁니다.
이제 여기까지 잘 해냈다면 21~24번과 29~42번 문제를 쭉 달리면 됩니다. 물론 마지막에 순서 삽입/빈칸 추론을 몰아서 풀겠죠. 저는 둘 중에서는 보통 빈칸 추론을 먼저 해결하는데요. 빈칸은 결국 주제랑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앞에 주제 찾는 문제들로 워밍업이 된 상태에서 별다른 전환 없이 조금 더 능동적으로 생각하면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순서 삽입을 해결하죠. 그중에서도 원래 한 지문이었지만 (A) / (B) / (C)로 잘린 문장들을 원래 순서로 배열하는 2문제를 먼저 풀어요. 원래 지문의 문장 구성이 a - a’ - b - b’ - c - c’이었다면 a를 문제 조건에서 시작점으로 주고 a’ - b / b’ - c / c’ 이렇게 끊어서 제시하기 때문에 단서를 잘 활용하면 그렇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특히 약한 부분은 이다음에 나오는 문장 삽입 문제입니다. 지문에서 딱 한 문장만 뽑아서 <보기>에 제시하고 원래 위치를 파악하는 문제인데요. 이거 은근 빈칸 추론보다 더 헷갈립니다. 4번이나 5번이 정답인 것 같은데 둘을 가르는 단서가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을 때, 지문에 넣어서 읽어보면 둘 다 가능해 보여서 더 방해되죠. 직접적인 연결사로 단서를 안 주면 온전히 글의 흐름과 위계 관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더 조급해집니다.
“5분 남았습니다. 다 못 풀었더라도 지금은 마킹부터 하세요.”
‘아… 제발 뭐 하나라도 눈에 보여라. 왜 근거가 더 안 보이지?’
이제는 손에 샤프가 아니라 컴싸를 들고 마지막 문제의 답이 바로 보이면 답안지에 그냥 마킹하기로 합니다. 남은 시간은 1분, 종 치기 직전에 마킹을 끝내야 1/5 확률이라도 생깁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두게 생겼습니다. 컴싸를 쥔 손이 미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하, 몰라. 그냥 처음 생각한 답으로 하자.’
몇 초 뒤에 바로 종료령이 울립니다.
“자! 다들 머리에 손 올립니다. 지금부터 움직이면 바로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국어 못지않게 복잡했던 영어가 끝나고, 제2외국어를 선택하지 않는 대부분의 수험생들에게 마지막 시험이 될 4교시 탐구 영역입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초중고 12년의 결실이 2시간도 남지 않았습니다. 기쁘긴 한데 점심 도시락의 든든함으로 충전한 에너지는 영어 영역으로 이미 방전된 지 오래입니다. 힘이 축 빠져서 미리 챙겨 온 프로틴 가득한 에너지바를 꾸역꾸역 씹어 삼킵니다. 일반 초코바처럼 달콤하고 바삭한 맛이 아니라 퍽퍽하고 흙 씹는 맛입니다. 이건 살려고 먹는 겁니다. 지금부터 머릿속에서 영어는 잠깐 지웁니다. 이번에는 감독관 세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교탁에 자리 잡은 감독관 한 분이 OMR 카드가 담긴 봉투의 밀봉 테이프를 제거하시면서 학생들 긴장 좀 풀어주려 장난으로 한 마디 하십니다.
“자, 한국사는 결시하면 성적표 못 받는 건 다들 아시죠? 혹시 지금 퇴실하실 분?”
한국사는 안 치면 수능 성적표 배부조차 안 되는 필수 과목이지만, 몇 년 전까지는 사회탐구 선택과목 중 하나였기에 상대평가 시절 그 수준으로 출제하면 이과생들에게 불리할 수 있어서 쉽게 나오죠. 지엽적인 내신 시험이 오히려 수능보다 어려운 정도입니다. 때문에 내신 대비를 열심히 한 학생들은 고3 내내 한국사 공부라고는 모의고사 시험지만 보다가 수능날에는 5분 컷을 하죠. 나머지 25분은 뭘 하냐고요? 다음 교시가 시간 압박이 엄청난 탐구 과목이니 머릿속으로 열심히 탐구 개념 복기를 합니다. 약간의 낮잠으로 기력을 보충한다는 학생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탐구 시작했는데도 머리가 잠에서 못 깨어날까 봐 시도는 못 했습니다. 본인 몸에 25분의 수면이 큰 힘이 된다면 잘 수도 있죠. 근데 저는 수능날에도 엎드렸는데 잠이 올진 모르겠어요. 실제로 현역 시절 저는 탐구 걱정만 가득해서 주위에 엎드리는 사람이 나와도 못 잤어요.
특히 제가 현역일 때부터 한국사 답안지를 탐구 선택과목 2과목과 분리시키는 것으로 개정되어서 총 시험시간이 5분 더 늘어났어요. 탐구 영역은 20문제씩이라 30~45문제인 다른 과목보다 문제 양과 시험 시간에서 차이가 많이 나죠. 그래서 원래는 4교시 탐구 영역 답안지로 인적사항 옆에 한국사 20문제 한 줄, 1선택 한 줄, 2선택 한 줄로 구성되어 있었고 저도 고2 모의고사 때는 그런 답안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한국사만 따로 쓰기 시작한 것이죠. 답안지를 제출하고 이후에 선택과목 답안지를 새로 받으니,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시험실 감독관분들이 복도 감독관분한테 부탁드려서 학생을 맡깁니다.
드디어 선택 과목입니다. 두 과목의 답안지가 붙어 있어서 매년 부정행위로 적발되는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각 선택과목을 칠 때, 해당 선택과목의 답안만 건드릴 수 있는데도 지키지 않는 학생이 매년 나와요. 가장 흔한 경우가 1선택에서 시간이 부족해서 풀다가 마킹을 못해서 2선택을 풀면서 슬쩍 마킹하는 것이죠. 2선택을 다 풀고 기억을 되살려 생각해보니 아까 1선택에서 헷갈렸던 문제의 정답이 다른 선지였음을 뒤늦게 알아내서 답을 바꾸려는 학생도 있죠. 저는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서 그렇게 답안지를 건드릴 일은 없었는데요. 오히려 탐구 때 감독관 세 분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안 들키고 답을 고치는지 의아했습니다. 시험장에 책상이 4열로 배치되어 있어요. 감독관 한 분은 교탁에서 전체적으로 학생들을 둘러보시고, 다른 한 분은 1~2열 사이를 열심히 걸어 다니시고, 나머지 한 분도 3~4열 사이에 계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답안지에 손대는 순간 바로 걸리지 않을까요?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수능 탐구 2과목을 치면서 1과목 답을 수정했는데도 안 걸렸다.’라는 무용담이 있긴 합니다. 제가 직접 수능 치기 전에도 저런 경험담은 반신반의했으나, 직접 쳐보니 더 안 믿게 되었어요. 그리고 모의고사칠 때는 여유가 좀 있었다 해도, 막상 수능은 30분 동안 20문제 풀기도 바빠서 이전 과목 생각할 시간은 확보하기 힘듭니다.
제 현역 수능 탐구를 요약합니다.
1. 심리적 요인 때문인지 수능날은 개념 문제도 거저 주지 않았습니다.
사회탐구는 개념어에서 응용이 생기죠. 미리 공부하면 ‘이거랑 저거랑 같은 말이구나.’하는데, 공부해놓지 않으면 ‘이거 처음 보는 한자어인데 무슨 소리지?’하게 됩니다. 당해 인강에서 수능특강 문제 선지에 나온 표현을 정리했지만 수능날은 확실히 알아도 ‘이것도 혹시나 틀리면 킬러랑 똑같이 점수 까인다.’라는 생각에 쉽게 넘어가기 힘듭니다.
2. 개념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뺏기니 열심히 연습한 킬러 ‘도표’를 더 조급한 상태로 풉니다.
공부할 때 항상 기다리던 11월 18일 16시 37분이 왔습니다! 시험장 밖 복도가 환희로 가득 찼습니다. 시험 결과가 어떻게 됐든 수능이 끝났다는 마음에 학생들이 한껏 들떴습니다. 저는 경험 삼아 5교시 제2외국어/한문 영역을 신청했기 때문에, 5교시까지 남아 시험 치는 학생들만 모아 놓은 시험실에 있었습니다. 응시료도 더 비싸죠. 근데 어떤 친구가 손을 번쩍 듭니다.
“선생님, 저… 제2외국어 포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 포기각서 쓰고 나가면 되는데, 교무실로 같이 가실래요? 혹시 저 학생 말고 제2외국어 포기할 사람 더 있나요?”
1/3 이상의 학생들이 갑자기 손을 듭니다.
“오, 꽤 많네. 그러면 손 들고 있는 학생들은 가방이랑 다른 짐들 다 챙겨서 저랑 교무실로 가시죠.”
저도 1시간이라도 집을 일찍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포기할 뻔했으나, 돈이 아까워서 마저 치기로 했습니다. 이제 편해진 마음으로 창문에 처음 눈길을 뒀더니, 짧아진 겨울 하늘의 해가 저보다 일찍 하교하네요.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중학생 때 종례 일찍 끝난 반 학생들의 하교 소리가 들리던 것처럼 운동장의 울림이 내가 있는 교실로 닿았습니다. 하늘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어린아이에서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다녀온 학교가 우리의 하늘이었습니다. 어쩌면 좁고도 넓은 공간이었던 지금 그 하늘에서 정말 넓은 하늘로 달려 나갑니다. 두꺼운 패딩으로 막을 수 없이 추운 날 교문 밖에서 기다리시던 그들의 부모님을 행복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애정 표현이 부끄러워서 안기지 않았던 학생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아이처럼 안깁니다. 관용적 표현으로 닿기 힘든 하늘이라는 SKY 대학의 의미도 있겠으나, 우리는 벌써 하늘에 닿았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때 마지막 감독관으로 들어오신 분의 선한 인상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제2외국어는 앞에 기본적인 발음이나 문화와 관련된 몇 문제를 빼면, 나머지 문법 문제들은 제가 읽고 무슨 뜻인지는 알아도 문법적 오류를 판별할 정도의 실력이 안 되어서 최대한 열심히 풀고 마킹을 일찍 했습니다. 이후 지루한 시간만 보내다가 드디어 마지막의 마지막 종료령이 울렸어요! 학생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있으면, 몇 분 후에 아침에 나눠준 이름표를 붙여서 수거한 핸드폰이 가득 든 쇼핑백을 시험실에 전달해 주시죠. 하나씩 받아서 나가도 된다는 안내가 나오니 그 감독관분은 활짝 웃으시며 학생들한테 하나하나 먼저 ‘수고 많으셨어요.’라고 인사하시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수능 감독관으로 오신 분들도 누군가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시니까요. 그래서 저도 더 기분 좋게 인사를 드리고 복도로 나왔습니다.
계단을 한참 빙빙 돌아 내려가면서 보이는 창문에 걸린 풍경이 보입니다. 아까보다 해는 많이 졌지만 아직 깊지는 않은 남색 저녁 하늘과 공허한 운동장의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저도 드넓은 하늘을 향합니다. 책가방과 도시락 가방을 들고 운동장을 걸어가는데 교문 앞에 큰 조명에 비친 익숙한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멀리 있어도 알아볼 수 있죠.
“아빠!”
아빠가 무거웠던 가방을 듭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옛날에 하교할 때가 생각납니다.
“고생 많았어! 뭐하고 싶은 거 있어? 다 하게 해 줄게!”
“나 댄스학원! 근데 엄마가 싫어해.”
“안 그래도 엄마가 그 얘기하더라. 어디 부산에 있는 학원?”
“아직 정확한 계획이 없어서 모르겠어. 그냥 춤이 좋아. 차는 어딨어?”
“아까 아침에 내려줄 때 댔던 거기에. 가자!”
어후. 역시 입실할 때도 차가 많아서 번잡했는데, 어찌 몇 명밖에 안 치는 5교시가 끝난 6시에도 번잡합니다. 어른들도 퇴근시간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빠랑 나란히 갈 공간이 안 나와서 일렬로 조심히 걸어 차 5대를 빡빡하게 주차할 수 있는 주택 단지 뒤편 공터로 갔습니다. 날 것의 시멘트 회색 벽이 양쪽으로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사이드 미러가 닿을 정도로 좁았죠.
“어, 어, 흐익!”
저 진짜 수능 끝나자마자 억울하게 교통사고 당할 뻔했습니다.(재수 없게. 어? 진짜 n수 못할 뻔했습니다.) 무슨 상황이었냐면(갑자기 수능철TV) 1차선 주택가에 인도가 없으니까 저는 갓길로 바짝 붙어서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 왼쪽 시멘트 벽 주차 자리에 검은색 벤츠 한 대가 시동 걸고 갑자기 튀어나왔어요. 다행히 수험생 어머니로 보이는 운전자(밍크코트 입고 계셔서 기억합니다.)가 브레이크를 밟아서 살았지만 진짜 본넷에 받칠 거리였습니다. 저도 앞을 보고 걸으니까 오른쪽에서 차가 튀어나올 거라는 생각도 못했죠. 직후에는 너무 놀라서 뒤로 물러서기만 했는데, 운전자도 놀라서 한동안 정차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바로 옆에 주차된 아빠 차로 일단 지나갔습니다. 제가 엄청 소심한데 억울한 마음에 욕은 안 나오고 그냥
“아! 진짜…”
라고 번잡한 경적 소리에 묻히는 작은 함성을 지르고 아빠 차에 탔습니다. 당연히 운전자도 원치 않는 상황이었겠지만, 저는 진짜 맨몸으로 다칠 수 있었어요. 차에 타서 망상을 또 했죠. 진짜 1초만 늦게 브레이크 밟았으면 ‘수능 끝나고 나온 수험생, 귀갓길에 교통사고 당해 안타까운 소식’ 이렇게 대서특필 됐겠다 하고요. 아빠가 운전하는 동안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어, 끝났나?”
“응. 엄마 회사야? 지금 문 닫았어?”
“이제 마지막 손님 물건 찾아갔어. 잠그고 있어야지.”
“엄마. 그 건물 불 꺼지면 무섭잖아. 문만 잠그고 불은 다 켜놔.”
“알았어.”
운전하던 아빠가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 뭐 먹을래?”
“엄마, 오늘 저녁 뭐 먹을 거냐고 아빠가 물어보는데?”
“너는 뭐가 먹고 싶은데? 오늘은 너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나 그냥 회사 앞에 회전초밥집. 거기가 제일 가까우니까 회사 앞에 주차하고 걸어 가자. 근데 지금 차가 많이 막혀서 오래 걸리니까 조심히 있어.”
“그래. 천천히 와.”
그렇게 수능날 예민해서 속이 쓰릴까 봐 며칠 끊었던 탄산을 오랜만에 마시면서 초밥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원래 금지된 영역이 재밌죠. 집에 와서는 전투를 끝내고 먼지를 씻어 내리듯이 열심히 씻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미뤄두고 열심히 잤답니다.
제가 왜 n수생이 되었는지에 대한 후폭풍은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