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일기 20032023
제가 시험 결과에 상관없이 재수를 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고 싶어서 혼자 이과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사 집안 출신이냐?’라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집안에 의사가 하나도 없어서 더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환경이 중요한 이유가 ‘내면에 새겨지는 자연스러움의 정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풍족한 환경이 대물림되기 쉬운 이유는 금전적인 부분도 있으나 ‘우리 집은 이게 평균이고 자연스럽다.’를 태어나서부터 나도 모르는 새에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역으로 ‘결핍이 촉매가 되어 만들어지는 폭발적인 결과물’도 믿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이유가 이것이겠죠. 저도 용이 원래 어디서 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용도 개천에서 꿈틀거리기보다 하늘과 바다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결국에는 이뤄내지 않았을까요? 개천용이 요새 너무 없어서 미꾸라지라도 되면 다행인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저처럼 개천용을 꿈꾸는 사람은 분명 많을 겁니다. 여전히 성공한 사람은 나옵니다. 근데 그렇게 개천에서 탈출하려고 몸집 키우기에만 집중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시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죠.
‘부모님이 큰 지병을 갖게 되는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사무직은 건강검진이 격년에 한 번이었죠. 어머니가 그때 2년 만에 한 건강검진 결과에 단백뇨와 혈뇨가 의심되니 대학병원 신장내과에 가보라는 소견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2~3개월에 한 번씩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가시죠. 감기 한 번 걸려서 병원에서 진료받고 몇천 원, 약국에서 몇천 원 내는 때와 차원이 다릅니다. 약국에서도 꽤 큰 십만 원 단위의 비용을 내야 하고, 집에 오면 몇 달 치 약이 쇼핑백 한가득입니다. 대학병원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거 진료 한 번 예약해서 받기도 힘들고, 검사 맡길 때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는 시간도 엄청 길고, 막상 진료받을 때는 시간이 훅 지나가죠. 혹시나 급한 일이 생겨서 진료를 당기거나 미루기도 힘듭니다. 예약은 항상 꽉 차있고, 진료를 가능한 날로 미루자니 그동안 먹을 약이 비어서 그새 병을 키울 우려가 있으니까요. 타지에서 오시는 분들 못지않게, 부산에 살아도 진료가 있는 날 오전이나 오후 중에 하나는 날아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도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방학이면 항상 어머니 진료를 따라갔어요. 거기 가면 항상 어머니가 하소연하시는 점이 다들 60~70대 노인분들이신데, 혼자만 40대라서 진료실에 들어갈 때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대기실을 가득 채운 환자분들을 보면 어머니가 제일 젊고, 간혹 어머니 또래이신 분은 보호자이셔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여러분도 Part 1에서 보셨듯이 우리 어머니는 가장 이상적인 며느리상에 부합하는 분이시면서, 심지어 저를 낳기 전날까지 맞벌이와 전업주부보다 뛰어난 집안일을 놓지 않은 분이십니다. 그 정도로 열심히 살았으니 몸이 금방 나가는 것이죠. 세상은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건강까지 예외로 챙겨주지는 않나 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가 중학교 2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때, 어머니께서 신장 조직검사를 받으셔야 했기에 2박 3일간 그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입원부터 쉽지 않습니다. 접수할 때 꼭 대출하는 것처럼 써야 되는 자료도 많더라고요. 인적사항 외에도 보증인과 보증 매물의 매매/전세 여부 등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1인실을 쓸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6인실 밖에 없다는 답이었습니다. 자리도 제일 안 좋았어요. 양쪽으로 3칸씩 있는 6인실에서 입구에 세면대가 붙어 있는 칸이었어요. 커튼이 옆에 침대와 분리만 되도록 한 방향밖에 없어서 세면대 쪽은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병실에 계신 분들이 계속 들락날락하신다는 뜻이죠. 제가 여자 평균 키보다 5cm 정도 작은데요. 저한테도 작은 보조 침대를 간신히 놓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 사람이 계속 왔다 갔다 하니 엄마도 저도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물론 커튼을 벌컥벌컥 여는 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2박 3일 마음 편히 잘 수가 없었죠. 신장 조직검사를 하면 이틀 동안 바로 누워서 아예 몸을 돌아 누우면 안 될 정도로 움직임에 제한이 큽니다. 그래서 검사만으로도 편히 잘 수 없는데 병실 환경까지 안 좋으니 입원했다고 마냥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병원이 워낙 크고 톱니바퀴 맞물리듯이 자연스럽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 가족이 그런 일을 겪는 것이 달가울 수 없죠. 그때 제가 의사였더라면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저는 ‘포만감’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야. 계속 놀면 지겨워서 오히려 짧게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한다니까?’
‘돈이 넘치도록 많아도 행복하지 않대.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닌가 봐?’
저런 말들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죠? 저런 말들 특징이 인터넷에 한 줄이라도 올라오면 댓글창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개천용을 꿈꾸고 있으니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불타오르는 의지에 방해되는 말이라는 반감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를 달성하고 얻은 은퇴 후에 여유로움을 즐기다가 끝내 포만감을 느끼고 싶었고,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어도 행복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넘치도록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돈이 아예 없어도 행복하다’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저 두 문장만큼이나 많이 들어본 문장이 있지 않나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라.’
솔직히 자신의 부와 명예에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성공해서 직접 저 경지에 오르고 싶었어요. 굳이 생계를 위해 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 사회에서 내가 숨 쉰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일이 취미가 된 여유를 느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학교 다닐 때 음악, 미술, 체육 시간만 되면 깨닫는 사실은 내가 예체능에 타고난 재능이 없으니, 그나마 노력으로 보완할 수 있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넓은 공부를 최대한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체능은 재능이 필요조건이라서 재능이 있는 영역에 노력을 쏟아부어야 전공자가 될 수 있고, 적어도 입시 공부는 재능이 게임에서 쓰는 치트키라고 생각했어요. 치트키가 있으면 너무 감사하고 편해서 게임할 때 재미가 없어질 지경인데, 없으면 그때부터 경험치 쌓는다고 헉헉대는 거죠. 재능이 없으면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으나, 매우 고된 작업이라서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나 싶습니다. 초반에 그걸 딛고 올라선 일부가 과정 중간중간에 노력한 만큼에 비하면 초라한 보상이라도 흐뭇해하며 결국에는 성공하는 것이죠.
이게 지금은 구시대적인 성공 도식이라고 사다리 밑에서 누군가 비난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지금 점점 벌어지는 사다리를 향해 손을 뻗지 않는다면, 미끄러운 맨 벽을 손톱이 다 닭아서 피가 날 때까지 딛고 올라서려 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또 후회를 하겠죠. ‘그때라도 할 걸…’하고요. 저는 그 상태가 되면 스스로를 절대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걸 제일 잘 알기에 공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