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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수험일기 20032023

by 필명이오

이제야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아쉬운 부분은 당연히 많고, 목표에 대한 괴리감, 아예 원초적인 때부터 돌아가서 모든 선택을 뒤집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그런 일이 만에 하나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사실 제가 가지 않은 길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똑같은 길을 좀 더 잘 알고 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죠. 제가 중학생 시절부터 이런 후회를 할 때면 되뇌던 말이 있습니다.


‘과거를 후회하는 현재는 미래에 후회할 과거가 된다.’


사실 말이나 쉽지,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도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지금 현실에서의 어려움을 겪을 때면 몇 번이고 망상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을 하곤 했죠. 특히 아무리 머릿속으로는 망상을 해도 몸을 움직이면 되는 단순노동과는 달리 공부는 정신으로 하는 것이기에 방해되는 정도는 비교할 수 없었죠. 장기적으로 시험을 준비하다 보면 사회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훅 줄어들기 때문에 괜히 다 끝난 일마저 회고하는 때가 나도 모르게 많아집니다. 저만 그런가요?


저도 후회에서 벗어나는 완벽한 ‘정답’은 못 찾았으나, 적어도 몇 가지 ‘해답’은 찾은 듯합니다. 몇 가지 일화를 말해보자면,


제가 고3 입시가 끝나고 졸업만 앞두었을 무렵 5년 정도 치매를 앓으셨던 친할머니께서 안타깝게도 요양원에 입소하셨습니다. 그 이전에는 저희 아버지와 형제분들이 결혼으로 독립하시기 전부터 살던 달동네에 여전히 혼자 계셨고, 마지막까지 혼자 사시던 곳은 언덕에 지어진 주택 2층 전셋집이었습니다. 언덕 아래쪽에서 보면 2층이지만, 좀 더 올라가서 반대쪽에서 보면 1층이 반지하처럼 묻혀서 2층이 1층처럼 입구가 놓인 그런 집이죠. 그 집에 제가 5살 무렵인가, 아무튼 제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들어가셨으니 15년 안 되게 혼자 살다 아흔이 넘어 요양원에 가신 셈이죠. 제가 왜 정확하게 기억하냐면, 우리 집만큼 할머니 댁을 자주 간 자식은 없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부모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어릴 때부터 할머니 댁을 방문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부모님 월급날이면 퇴근길에 저도 차에 타서 어머니가 먼저 할머니께 전화로 ‘어머니, 저희 이제 출발할게요.’라고 하시면, 어린 날의 저는 전화를 바꿔서 ‘할머니, 밥에 콩 빼고 해 주세요.’ 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오야, 할미가 콩 빼고 밥해놓을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부랴부랴 도착해서 저녁을 할머니와 함께 하고, 어머니가 봉투에 30만 원씩 생활비로 할머니를 드리면, 할머니는 또 제 용돈을 조금씩 주셨거든요. 3~5만 원 정도? 제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나이에는 5만 원권이 상용화되기 이전이었고, 또 그때 물가를 생각하면 어린아이 용돈으로는 3만 원이라도 컸습니다.


할머니랑 저랑 현관 겸 마루청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시고, 할머니는 ‘어미야, 그냥 거 놔두고 어서 가거라.’하면, 어머니는 더 서둘러서 설거지를 마치고 짐을 챙기시죠. 저는 그때 할머니랑 한 번 안고 인사드리고 어머니가 차 문을 열고 태워주시면 뒷좌석 창문을 내립니다. 할머니께서 현관 앞에 있는 복도 겸 테라스 정도 되는 공간에서 난간을 잡고 자식들 가는 걸 차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보셔서요. 달동네 특성상 아래로 훤히 내다보이고 겨울바람도 세게 불죠. 아버지가 ‘엄마, 우리 갈게, 추운데 어서 들어가이소.’라고 말하셔도, 어머니가 ‘어머님, 빨리 들어가서 쉬세요.’라고 같이 말리셔도, 할머니는 개의치 않으시고 손주한테 ‘우리 ㅇㅇ이, 빠이빠이’ 하시려고 차 움직임에 따라 굽은 허리로 이리저리 힘든 걸음을 옮기십니다. 그러면 저도 뒷좌석에서 한 손을 들고 ‘할머니, 빠이빠이’ 하다가 더 이상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몸을 뒤로 한껏 돌려 뒷유리창으로 끝까지 손을 흔듭니다. 할머니도 말씀으로는 가라고 부추기셨으나 다시 혼자가 되는 아쉬움에 계속 인사를 하시니까요. 그렇게 집에 오면 10시, 어머니는 할머니 걱정하실까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또 드리고, 할머니는 ‘그래. 어미야, 우리 ㅇㅇ이 안 자면 바꿔주라’ 하시면 저도 인사드리고 하루를 정리합니다.


매달 월급뿐만 아니라 상여금이 나오는 날에는 또 가는 겁니다. 명절도 다름없습니다. 할머니도 자식들도 부산에서 쭉 사셨고 지금도 다름없는데요. 명절 전날 음식을 해놓고 다른 친척분들은 각자 댁에 가서 명절 당일 아침에 다시 할머니 댁에 오실 때도, 우리 집은 아버지가 막내아들임에도 할머니 댁에서 자고 차례를 지냈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침잠이 많았기에 날이 밝아 집안이 시끄러운 분위기가 되면 그제야 부스스하게 일어난 기억이 있거든요. 제가 마지막으로 일어났을 때 집안 어르신들과 사촌 형제들이 다 쳐다보는 부끄러움은 다들 아시죠? 일어나자마자 차례 지내고, 대가족으로 아침 식사하고, 할머니는 그 와중에 자식들 챙겨가라고 비닐봉지에 남은 차례 음식을 나눠 담으시죠. 다른 집들이 하나둘 출발해도 우리 집은 아직입니다.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고모들 도착하셔서 같이 간단한 점심이나 과일까지 먹고 나서야 출발했으니까요. 그리고 외갓집 가는 길 차 안에서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동안 어머니가 아까 할머니께서 싸주신 음식을 나눠주시면 간단히 먹으면서 휴게소도 들렀다가 경북 어디에 위치한 외할머니 댁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할머니께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자식 된 도리를 지켜나갈 수 있었고, 할머니도 조금 외로우시더라도 일상에 지장이 없어 자식들 올 때 밥 한 끼는 준비해 주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셨을 때가 좋았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할머니 댁 갈 때도 더 즐겁게 가고, 안부 전화도 먼저 드리고 싶어요. 나중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아쉬운 마음입니다.


할머니께서 여든 중반에 치매 진단을 받으시고 일상생활이 혼자서는 힘들어지셨을 즘부터, 평일에는 오전에 4시간 정도 요양보호사께서 할머니 아침과 나중에 혼자서 드실 끼니를 차려주시고, 그 외에 집안일이나 할머니 위생관리를 전반적으로 도와주셨어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추가되는 돈도 돈이지만, 그분이 시간을 내기 힘드실 때도 있고, 계속 추가 근무를 부탁드리기도 죄송하기 때문에 몇몇 형제들이 돌아가며 방문했습니다. 부모님이 같은 직장에 다니시고, 휴일이 토요일은 격주에 일거리가 적은 날에는 조금 일찍 퇴근하시는 정도, 일요일은 항상 쉬셔서 방문하는 날에 시간 맞추기는 좋았죠. 하지만, 제가 어릴 때처럼 밥 먹고 어머니가 설거지까지만 하고 오던 때와 다르게 말 그대로 어르신 요양을 전날까지 직장에서 근무한 피로가 쌓인 상태로 연달아하시다 보니, 어머니도 다녀오시면 그다음 날 일요일은 엄청 힘들어하셨습니다. 전문적인 요양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요령도 모르고 억지 힘으로 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죠. 전날이나 아침에 집에서 한 음식을 이른 점심 식사로 직접 떠먹여 드리고, 나중에 할머니가 혼자 드실 상을 차리고, 설거지하고, 할머니 위생 관리까지 다 하고 집에 오면 어머니의 주말 하루가 삭제되다시피 지나갑니다. 5년간 요양보호사 몇 분과 아버지의 몇몇 형제분들의 노력에도 나중에 더 이상 할머니를 오후에 홀로 둘 수 없는 안전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 할머니는 아흔이 넘으셔서 장전동의 한 요양원에 들어가셨어요.


부산대 뒤편 언덕에 요양원 여러 곳이 모여 있는 거리가 있는 줄은 할머니가 입소하시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앞에는 길 이름부터가 ‘부산대 젊음의 거리’인데, 뒤에는 아직 어리기만 한 제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공간이 밀집되어 있다니… 고요한 숲 속 언뜻 보면 유치원 건물처럼 알록달록한 외관, 종종 외래 진료받으러 휠체어를 타고 나오시는 다른 어르신들을 마주치고, 면회 장소에 도착해서 할머니를 마주할 때면 저는 시험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 생깁니다.


‘오늘은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실까?’


요양원에 들어가신 후에는, 자식들은 한참 보면 ‘ㅇㅇ이가?’라며 알아보시지만 그마저도 예전 모습으로 기억하셔서 ‘왜 이렇게 늙었노?’라고 하시고요. 손주들은 한참 봐도 대부분의 날들은 모르시고, 누구의 딸이라고 알려 드리면 그제야 ‘이만큼 작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지?’ 하십니다. 그리고 하필 저 없이 부모님만 간 날이면 정신이 온전하셔서 저는 어딨냐며 물으십니다. 저는 어머니가 집에 도착해서 폰에 찍어온 할머니의 눈시울이 빨개진 사진을 보여주실 때, ‘한 번 더 갈걸…’하며 다시 후회를 하죠. 그래서 다음에 직접 가면 다시 못 알아보십니다. 그래서 치매가 제일 무서운 병인가 봅니다. 할머니는 혼자 시간 여행을 하시는 것 같아요. 어쩌면 제가 하루라도 돌아가고 싶은 유년 시절의 모습으로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가 하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세월이 무색하게 한 번에 알아들으시죠.


그렇게 면회를 마치고 나올 때면 제가 하고 있던 고민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제가 왜 갑자기 먼 훗날에나 느낄 노후 얘기를 하는지 요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차피 열심히 인생을 살다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며 지난 삶을 회고할 즘에는 지금은 너무 날 괴롭히고 커 보이는 고민이라도 다 부질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그때가 오면 기억도 못 할 거고, 기억한다고 쳐도 ‘왜 그런 소모적인 고민을 한다고 더 생산적으로 살지 못했을까?’라고 후회만 할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만약 외부적인 갈등이라 상대방이 있었다 해도, 그 상대방은 그 문제 상황을 넘어 내 이름 석 자도 까먹은 지 수십 년일 겁니다. 그때 내 나이를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상대방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할지도 의문일 정도로 상황은 종결된 지 한참 전일 겁니다. 그 갈등이 있었는지는 이제 이 세상에 나밖에 모르고, 나만 잊으면 없는 일이 되는 날이 온 거죠. 문제마다 해결책은 다르겠지만, 내 힘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고 싶지도 않은 고민이라면 저의 경험처럼 이렇게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단순히 ‘나중에 고민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일들이다.’ 정도의 피상적이고 일반화된 문장이 아니라, 제가 어떻게 이런 생각에 도래했는지에서 당위성을 찾아, ‘이렇게까지 고민 안 해도 됐었구나!’를 느껴보세요. 저도 이렇게 기록을 남기면서 연습하는 중이거든요. 이런 경험이 쌓이면 우리도 마지막 순간에 평온하게 ‘이 정도면 삶을 잘 누리다 가는 거야.’하는 자기 확신 속에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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