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첫째
중학교 2학년 3월 중순이었다. 내 필명의 뜻이 ‘학창 시절 가장 재밌었던 중학교 2학년 5반’ 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하이틴 드라마스럽던 나날이었다. 소심하고 존재감 없던 내가 그렇게 반에서 시끄러워질 수 있는지 누가 짐작했으랴. 교과서 문학 작품에서 갈등이 풀어지고 해피엔딩을 맞을 때 같았다.
우리 첫째 고양이 신입이는 그때 만났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유기된 듯한 뽀얀 고양이가 제 발로 우리 부모님 회사를 찾아와 건물에 그냥 눌러앉아버렸다.
일단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해당 업계가 너무 좁아 제 정체가 드러날 우려가 있기에 대략적으로 말씀드림에 양해를 구합니다.) 부모님은 20~30년 같이 근무해서 가족 같은 직원분들과 ‘인테리어/건축 자재 가공 및 유통’을 하신다.
원래 친가 친척 중 한 분이 사장님으로서 운영하셨으나, 연세가 꽤 많으셔서 이제는 은퇴를 하고 싶다고 몇 년 전에 밝히셨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과 직원분들은 동종 업계라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셨다.(여기에 담긴 사연이 많으나, 우리 부모님과 직원분들의 아픈 상처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당장 건드릴 수 없는 분쟁은 생략하겠다. 단지 모든 시련을 겪고 의리로 뭉친 직원분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학군의 중요성’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부모님이 한 직장에서 거의 30년을 다니신 맞벌이 가정의 외동이다. 나는 크면서 자연스레 ‘우리 엄마 아빠는 맨날 바빠.’가 세뇌된 아이였지만, 자영업자로서 첫 발을 디딘 부모님은 상상 이상으로 바빴다. 투자금에 맞게 건물을 작은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에 이사 준비부터 큰 부담이었다. 가정집은 뭐 귀중한 취미 생활 용품이 그득그득하지 않은 이상 포장이사로 뚝딱하면 된다지만, 제조업 회사를 이전하는 그 자체가 어마 무시했다.
이사 이후 직원분들은 출고량이 많은 날을 빼면 정규 업무만 하시더라도, 두 분은 거의 첫 두 달 동안 ‘9 to 6’가 아니라 ‘6 to 9’의 삶을 사셨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9~10시에 퇴근하셨다.
내가 고3에서 벗어날 때가 되니, 부모님이 고3 비슷한 생활을 시작하셨다.(N수를 하고 있으니 나도 완벽히 벗어난 것은 아니군, 크흠.)
신입이가 열심히 돈 임장 끝에 선택한 건물 구조를 간략히 말해보자면, ㅁ자로 아파트 중대형 평수만 한 사무실이 통으로 있고, 그것을 ㄱ자로 더 넓은 현장이 감싸고 있다. 현장과 맞닿은 사무실 벽 높이의 반 정도는 쭉 유리창이 이어져 있다. 90년대 준공 복도식 아파트에서 방과 베란다가 윗부분에 유리창으로 연결되지 않는가? 구조가 그거랑 비슷하다. 그래서 현장과 사무실이 서로 잘 보인다.
건물 외관으로는 대형 화물차가 넉넉히 들어가는 주차장 앞에 사무실 입구와 현장 입구(큰 셔터)가 나란히 보인다.
신입이와 묘연이 닿아 집사 7년 차에 접어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동안 얘가 우리에게 오려고 많은 신호를 보냈다.
신입이가 처음 간택한 집사는 우리 아빠였다. 아빠가 마당에서 쭈그려 앉는 자세로 평소처럼 폰 게임을 하는데, 갑자기 무릎 밑에 뭐가 쑥 지나가서 깜짝 놀랐다고. 그래서 정체모를 생명체에 식겁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더니, 큰 움직임에 신입이도 놀라고, 애교 많은 고양이를 처음 본 아빠도 놀라고, 결국은 서로 놀라서 신입이가 도망갔다더라.
신입이를 키우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인간친화적 고양이를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우리가 고양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람을 보면 흠칫하고 몸을 숨기는 동물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나도 신입이와 첫인사를 하려고 쭈그려 앉았을 때, 신입이가 좋은 의도로 달려오는데도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신입이가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는 소식은 하교 후에 엄마한테 받은 카톡으로 들었다. 아까 언급한 현장-사무실 유리창틀에 올라간 첫째의 사진 몇 장을 엄마가 보내줬다. 그전에도 엄마가 영상통화로 건물 주변을 맴도는 수상한 고양이를 보여준 적은 있었다.
“이거 뭐야?”
“신입생”
“털이 되게 깨끗한데?”
“그러게 며칠 전부터 보이더라.”
어딜 내놔도 사랑스러운 우리 고양이들 사진을 많이 올리고 싶지만, 스스로 밝히기도 전에 필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부담스럽기 때문에…
‘(대충 현장 쪽 창틀에 올라가서 사무실에서 보이는 고양이 사진)’
‘신입생이다. 거기서 밥 먹어?’
‘아니. 나 보고 있더라. 밥은 안쪽 사무실 문 앞에서 먹고.’
‘도망 안 가?’
‘안 가지. 밖에 길고양이 때문에 안 나가더라.’
‘가까이 가도?’
‘바로 앞에서 그냥 울고 한다.’
‘신입생 착해. 퇴근하면 쟤 가둬지는 거 아니야?’
‘그렇지.’
‘놀라겠다.’
‘밥 놓고 가지 뭐.’
‘그래. 그럼 저기서 키우는 거야? 박스나 신문지라도 하나 깔아줘.’
‘어.’
나는 애교 많은 고양이가 도대체 어떤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금요일 하교하자마자 신입이를 보러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현장 바닥에도 꾹꾹이를 하며 나에게 달려오는 신입이를 순간적으로 피하긴 했으나, 아빠가 “쟈는 괜찮다. 애교 많고 사람 안 물어.”라고 알려준 뒤로, 유튜브에서만 본 반려 고양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신입이의 성향을 잘 아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신입이는 다시 버림받지 않으려 초조하게 구애했다. 사람과 눈만 마주치면 어디든 꾹꾹이, 무릎에 이마를 부비적, 애교 가득한 ‘먀-아옹’ 소리. 그때를 제외하면, 신입이가 꾹꾹이를 한 모습을 본 게 손에 꼽는다.
신입이의 구애는 성공적이었다. 부모님 퇴근시간까지 꽃샘추위도 잊고, 현장에 놓인 캠핑의자에 앉아, 내 무릎에 올라와서 자는 신입이를 꼭 안고 있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장면 하나가 있다. 퇴근시간 무렵 신입이가 깨서 얼굴을 한 번 부르르- 털고, 내 양쪽 어깨에 발을 하나씩 올려 쭉쭉- 기지개를 켰다.
신입이의 촘촘한 겨울털~ 지금도 집사가 눕자마자 허벅지 사이로 올라와서 같이 자는 신입이가 고맙다. 집사의 천연 핫팩!
고양이가 참 영리한 게 상처를 받았어도 나름의 해결책으로 며칠 동안 주변을 맴돌면서 ‘여기가 내가 살 곳인가?’를 잘 살폈다.
1. 가공 기계 설치 때문에 높은 층고
덧붙여 고양이 눈에는 거대 캣타워로 보이는 선반의 행렬
2. 겨울에 현장에서 자도 끄떡없는 온기
예열된 기계가 퍼뜨리는 온기는 정말 축복… 여름에는 단점일 수 있다.
3. 집사들이 출근하면 사무실에 빵빵하게 틀어주는 냉난방
거래처분들이 방문하시면 마음껏 자고 있는 고양이가 일하는 사람보다 팔자가 좋다고 하신다.
4. 동물을 좋아하는 집사들이 아낌없이 주는 먹거리와 사랑
행복하게 컸으면 해서 간식은 아끼지 않았다. 집사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동물을 생각할 때 가장 후회하는 점이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냥 먹고 싶다는 대로 다 줄 걸…’이라는 댓글을 봤다. 언젠가는 올 날이란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글로만 봐도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투자는 신입이한테 물어봐야지. 신입아, 우리를 간택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