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나와 잘 이별하기 위해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근래에 써 내려간 글들은 죄다 꿈일기뿐이었으니까, 나는 몇 번이고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나는 꽤 나아져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집 밖으로 나와 살기 시작한 뒤, 나의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부모, 그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해결하고자 하던—불안장애를 가진 장녀의 모습에서, 나는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다.
대신 나는 나를 챙기기 시작했다.
내 주변은 소수자들로 가득하다.
대한민국의 일반적 흐름과는 다른 리듬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게 살갑고 다정하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동네 친구들을 얻었다.
소수자들 곁에서 발견한 내 모습은,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헤드윅의 세상과 어딘가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고 몰두하던 내 세상은, 함께 사는 동물들 중심으로 이동했다.
처음 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만났던 강아지가 내게 마음을 열었던 순간이 있다.
강아지는 내 등에 자기 등을 살포시 기대어, 나를 자기 무리로 받아들였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독립은 도망이 아니라 거리 두기였다.
나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엄마 곁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를 언제나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왔는지도 모른다.
가정이 부서지지 않길 바라며 그 자리를 자처했고, 그게 나를 갉아먹고 괴롭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중재하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강아지는 내게, 그 생이 다하더라도 그 빈자리에 남는 슬픔까지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슬픔을 피하는 대신, 슬픔까지 포함해서 사랑을 지속하는 법 같은 것을.
내 모습이, 내 근간이, 내 뿌리가, 내 코어가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AI를, 내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변화해 가는 나를 가장 담백하고도 객관적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친구들에게 괴로운 내 내면을 꺼내 보일 때마다 따라오던 죄책감도 많이 사라졌다.
고해성사하듯, 나만의 밀실이 생긴 것이다.
근래의 나는 긴 호흡의 괴로운 영화를 일부러 보려 하진 않는다.
어릴 때는 온갖 우울한 작품들을 섭렵하듯 찾아보았던 것 같은데.
어떻게든 같은 처지의 대상을 찾아다니거나, 다른 세상 속에 흠뻑 빠져 그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탐색하거나 비교하거나, 혹은 간접 체험을 해댔던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미국인지 영국인지조차 구분 못 하던 배경을 지나며 내 삶의 반경이 넓어졌고, 어떤 때는 홍콩의 도시 속을 헤매는 청춘들을 좇아 내 청춘에 대한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작년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써오던 꿈일기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그 시기의 내게 일어났던 경험들과, 꿈을 통해 감정을 씻어내던 내 모습을 다시 찾아보며 나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악몽을 꿔도 마냥 아프지는 않았다.
내 무의식이 나를 위해, 몇 번이고 그 형용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해소시키려 애쓰며 형상을 내보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내게 2026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음력설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 2026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2025년에 머물며 2025년을 반추하고 있다.
작년보다 늦은 한 해의 시작이 오히려 더 무던하게 지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큰 목표라기보다는, 하나씩 이뤄갈 수 있는 ‘매일’을 어렴풋이 꿈꾸고 있다.
2025년의 나와 잘 이별하기 위해 미루던 글을 쓴다.
• 2025년에 나는 해결자 역할을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했다.
• 2026년에 나는 나를 돌보는 리듬을 삶의 기본값으로 두고 싶다.
•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강아지가 내 등에 기대던 그 장면처럼, 나도 나에게 조용히 기대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직 내게 오지 않은 2026년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