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일럿대디 Nov 03. 2018

내가 악마가 되었다

우는 아이 화내는 엄마

이제 아이 키우는 일은 저의 몫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양육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요.


부모님의 영향이었을까요.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마음은 제 깊숙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게 한 책임감이라고 해두죠. 


그러나 단순히 마음만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아를 하다 보면 때에 따라서는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나의 ‘사랑하는 마음’보다 중요할 때가 있던걸요. 그리고 이제 아이를 도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지금의 저는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이가 울 때, 기저귀를 갈까 우유를 더 먹일까 정도의 고민이 아니에요. 어떤 육아관을 가지고 키워야 할까, 라는 고민입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혼자 애쓴다고 쉽게 해결되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서점이란 곳을 가보려 합니다. 

학생 시절 참고서 몇 권 구할 때만 들렸기에, 저에게도 서점은 낯 설은 곳이네요.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양질의 육아를 하기 위해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곳입니다. 어제도 밤새우는 아이 때문에 선잠을 잤지만, 기저귀 가방을 챙겨보아요.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현관을 나섭니다.


자가용으로 30분 걸릴 거리를 1시간도 더 걸려 왔습니다. 카시트에 들어가면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를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덕분에 아기가방을 메었던 등과, 아기띠와 맞닿은 부분이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마저도 아기띠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기에 바빠 이제야 겨우 알아차렸네요. 


서점의 자동문이 열리자 알맞게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근처 백화점은 너무 춥다는 느낌뿐이었는데,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라 그런지 배려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네요. 아이는 오는 길이 피곤했는지 실내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곤히 잠들었습니다.


자, 이제 시작해야 해요. 소중한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왔으니 열심히 책을 봐야 합니다. 유익한 책을 찾기 위해, 그리고 방해받지 않고 독서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보아요.


역시, 서점에 오길 잘했습니다. 그동안 어렴풋이 생각한 육아를 책으로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네요. 설레는 마음으로 한 권, 두 권 읽어나갑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읽다 보니 아이가 배고픈 울음으로 낮잠에서 깰 때에는, 두 손에 묵직한 느낌이 들 정도의 책이 들려있게 되었네요. 그 덕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배는 더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즐겁습니다.

물론 게 중에 몇 권은 집에 와 다시 읽고 제목에 속았구나 하는 책도 있었어요.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책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부는 소장하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추천 목록을 만들어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다들 읽어봤는지 모르겠네요.


참, 제가 서점에서 주로 골랐던 책은 ‘애착육아’에 관한 서적이었어요. 혼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저는, 내 아이도 나와 같은 성격일 거라 판단하여 키우기로 합니다.

훈육보다는 사랑을, 지적하기보다는 관심을 주기로 말이죠. 물론 쉽지 않겠지만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한번 크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한번 생각이 굳으니 계속해서 같은 방향만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믿음은 실수를 연발하기도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때는 제가 맞다 라고만 생각했죠.


길을 가다 자녀를 혼내는 부모를 마주칠 때면, 어떤 상황인지 판단하지 않고, 속으로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간 읽은 책의 내용을 되새겼습니다. 이 정도가 되니 제 육아관을 확신할 정도가 되더군요. 최소한 제 머릿속에서는, 육아에 관해 저보다 잘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본격적인 ‘육아전쟁’이 시작되자 다른 부모와 다르지 않았어요. 아이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다만 애써 그 ‘울컥’하는 감정을 겨우겨우 참아내야 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참기만 하면 언젠가 터지기 마련. 언제부턴가 마구 때를 쓰며 울어대는 아이에게 이성을 잃고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악을 쓰며 울었죠. 처음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엇인가를 아이에게 쏟아내었어요. 답답한 마음을 풀어버리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속은 후련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냈다’는 후회 속에 자책감만 남곤 했죠. ‘책대로 하지 못한 실망감’과 ‘아이가 잘못될 것이라는 불안감’과 함께.

아이가 그 고운 얼굴 한가득 실핏줄이 터지게 울다 잠든 날이면, 미안한 나머지, 죄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읽은 책을 다시 살피며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은 책이요 현실은 현실이더군요. 

아이가 깨면 다시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다간, 아이는 아이대로, 저는 저대로 둘 다 미쳐버릴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에요.


솔직히 뒤돌아 생각하면 특별히 화낼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화는 냈다는 게 문제예요. 화를 내는 내가 선뜻 이해가지 않다 보니,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집니다. 내가 이 정도였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요.


누군가는 이런 나를 위로해주고, 다독여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내가 돌아왔어요. 그저 아이를 달래주고 제게 괜찮다는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지나쳐 아이만 안아준다 해도 서운 하지 말자,라고 생각하던 중 번쩍 눈이 뜨이게 하는 아내의 화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애가 잘못했으면 얼마나 잘못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


화를 낸 게 저만의 잘못일까요.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실수인 건가요.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누구보다 제일 속상한 건 바로 ‘화를 낸 사람’이란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합니다. 

아내에게 나의 이런 마음을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지만 상사에게 치이고 실적으로 압박받다 돌아왔으니 얼마나 힘들겠나, 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이런 마음도 분명 몰라줄게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매거진의 이전글 애 보는 게 뭐가 힘드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