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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일럿대디 Nov 09. 2018

기념일을 잊었다는 건, 나를 잊은 거야

네가 없어 더 쓸쓸한, 어느 겨울 내 생일

그이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입니다.

업무 혹인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일은 물론이고 결혼기념일 심지어 그들의 자녀까지 챙기는 것을 보고 놀란 일도 있네요. 이런 사람이라면 내심 기대하게 되나 봅니다. 다가오는 기념일에 어떤 이벤트를 준비해줄까 하며 즐거운 상상에 빠졌던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를 비롯한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은 제때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장인어른의 생신도 깜빡하고 넘어가 제가 매번 챙길 정도가 되니, 우리 부모님 생신을 잊는다 해도 크게 놀라울 게 없네요. 새해 달력에 가족의 기념일을 적어두는 일은 늘 제 몫입니다.

물론 이런 게 용납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크게 변명할 여지는 없습니다. 연애할 때도 그랬고, 결혼한 지금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죠. 알고 결혼했으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 사람을 챙기느라 가족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오늘만큼은 속 편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 싫습니다. 제가 육아를 하고 있기 때문일까 짐작해 보아요.


올해만큼은 잊지 않고 넘어가 주길, 내심 바랬습니다. 나의 커리어와 경력을 포기하고 육아를 하고 있는 나의 처지를 보상받기 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큰 이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대로 혼자 쓸쓸히 생일을 보내야겠네요.


연말입니다. 아직 12월의 초입에 접어들었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경쾌하게 울리며 올 한 해도 고생했다고 다독여 주네요. 회사도 연말이 되면 격려차원의 회식을 준비하죠. 아내도 연말을 준비하는 게 느껴집니다.  


아내의 회사는 규모가 작은 기업입니다. 직원들 서로가 길게는 10년도 넘게 알아오다, 힘을 합해 창업한 케이스예요. 서로 끈끈하게 이어져 그런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 되면 손글씨로 애정이 듬뿍 담긴 연하장과 선물을 준비합니다.

서로 모여 살던 서울 강남에 터를 잡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지금은 거주지가 전국으로 산재되어 쉽게 모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한 달에 한번 하는 회의도 두세 달 전부터 계획해 날을 잡아야 해요. 이러다 보니 송년회를 계획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각자 일정이 바빴기 때문이죠.


아침부터 밖으로 나가자는 아이와 힘겨루기를 하는 제게, 큰 동그라미가 표시된 달력을 눈앞에 들이 밉니다. 12월 29일.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요. 아내가 제 생일을 기억해 주었습니다. 강의다 회의다 늘 바빠 생일이 한참 지난 후에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올해는 다른가 보네요. 깜짝 파티를 열어주지는 않았지만, 생일을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찰나, 아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날 송년회라 서울 다녀올게. 다음날 오니 다른 일정 잡지 말고.”


제게 그날 다른 일정이 있을 리 없습니다. 생일이니까요. 아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저라도 케이크를 사고 미역국을 끓이려 했습니다. 아이를 보며 생일파티를 계획해야 하니 거창하게 할 수 도 없죠. 그저 가족이 함께 단란한 하루를 보내기만을 기대했습니다. 이런 게 욕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너무 하네요.


서로가 일정을 조율한 결과라 해도 하필이면 왜 그날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늘 참아왔지만 이번에도 넘어가면 제가 참지 못할 것 같아 “다른 날짜로 하면 안 돼?”라고 물어보니 아내가 대답합니다.


“그날이 무슨 날인가? 사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 내가 그날로 정했어.”


부산에서 서울로 가야 하는 아내에게 가장 먼저 결정권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제일 먼 곳에 사는 사람을 배려해 준 결과겠네요. 그 배려가 오늘 이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물어볼 힘도 없어, 말없이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요.


아내의 송년회 날이 되었습니다. 제 생일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아침부터 분주합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한껏 치장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네요. 첫 비행기라 말해주었던 게 생각합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에, 아내는 끝까지 모를 거예요. 해를 넘겨서라도 챙겨주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합니다.  


원망해서 변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속상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오늘만큼은 그렇게 해보려고 합니다.


“사회 속에서 격리되고, 친구들과 멀어지고, 아이와 단 둘이 남겨진 채 일하고 돌아오는 너를 기다리고 바라보고 기대하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건 상처뿐인 현실은 불공평하다.”


올해는 유난히 추운 겨울입니다. 그래서 마음까지 더 추워지는 생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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