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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난 레옹이 Dec 14. 2022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몰락

겨울 숲이 전하는 말

겨울 숲을 걷는다. 귓바퀴와 콧등을 사정없이 자극하던 칼바람이 덩치 큰 나무기둥에 부딪쳐 다시 돌아온다. 그리곤 허파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나 자신이 살아있는 자연의 일부임을 느낀다. 핸드폰을 차에 고이 두고 왔다. 꼭 받아야 할 전화와 문자와 알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음을 온전히 숲에 쏟기 위한 소심한 일탈이다. 그래서 핸드폰 속의 내가 아닌 ‘진짜’ 나를 만나려 한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숲에 몸을 누인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겨울나무는 모든 것을 떨구고 완벽한 비움을 드러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벌거벗은 가지 끝을 본다. 겨울눈이다. 봄에 꽃이 피고, 잎이 돋고, 새로운 가지가 움트는 소중한 기지다. 자세히 보니 같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겨울눈들도 크기와 모양, 빛깔이 제각각이다. 처한 상황이나 그 상황에 반응하는 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리라. 나무는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한다. 그 변화를 식물학에서는 진화 또는 천이라 한다. 나무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결과이며, 단순성에서 다양성으로 가는 생명의 법칙이다. 만약 어떤 나무가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안타깝게도 그 나무는 멸종이라는 위기를 피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 다양성의 무게로만 보더라도 눈부신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야말로 현존하는 지구 생물 가운데 가장 먼저 멸종하지 않을까? 특히 IT산업의 발달은 다양한 문화를 획일화시켰지 않나. 이제 우리는 전 세계 대부분의 도시에서 거의 같은 문화를 즐기고, 같은 정보를 공유하며, 같은 물질을 소비한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의 문화가 서로 다름을 찾기 어렵게 됐다.

겨울 숲에 누워 굳이 인류의 멸종을 걱정하다니. 나는 엉뚱한 공상가인가, 아님 지독한 현실주의자인가? 동행이 고개를 갸웃한다. 한 치 앞도 모르고 살면서 너무 멀리 가지 말란다. 칠레의 이스터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칠레 본토에서도 비행기로 무려 5시간 거리, 그래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남태평양의 외딴섬이 이스터섬이다. 우리에겐 2008년 가수 서태지가 이 섬의 모아이 석상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유명세를 탄 적이 있다. 모아이 석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다. 온통 허허벌판인 섬의 해안선을 따라 석상 8백여 개가 늘어서 있는데, 남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작은 황무지 섬에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이 거대한 석상들을 세웠는지, 외계인의 작품이라 여길 만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수수께끼 안에는 몇 가지 가설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나는 고립된 상태로 살던 이스터섬사람들의 부족 간 경쟁이 빚어낸 문명의 흔적이란 가설에 무게를 둔다. 부족들은 수백 년에 걸쳐 세의 과시를 위해 서로 앞 다투어 거대한 석상을 만들었고, 더 크고 더 많은 석상을 운반하기 위해 끝없이 많은 나무를 이용해야 했다. 결국 숲이 사라지면서 숲에 깃들어 살던 생물들이 멸종했고, 그로 인해 섬은 인간이 살기 힘든 황무지가 됐다. 먼바다 너머에서 생긴 하나의 문명이 인간의 욕심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된 등골 오싹한 이야기다.

비움으로 채움을 일구는 겨울 숲에서 이스터섬의 사라진 문명을 되짚는다. 우리는 그들과 다를까? 나무와 숲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모든 걸 인간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이용하지는 않나? 어여쁜 아파트 정원수가 햇빛을 가리면 주저 없이 가지치기한다. 꽃가루가 많이 날리는 가로수는 아예 뿌리째 뽑아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산소배출량을 이유로 갑자기 나이 든 나무는 베어내고 어린 나무들로만 숲을 가꾼다고? 균형감을 상실한 인간의 일방적인 질주는 결국 자연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파괴할 뿐이다. 찬란했던 이스터섬의 몰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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