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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Jun 07. 2020

냉장고에만 넣으면 잊어버리는 병


냉장고에만 넣으면 잊어버리는 병




 조금 화가 났던 한밤중, 집에 내가 키위를 사다 놓았다는 걸 편의점에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나갈 때 문득 깨닫고 말았다. 사 놓은지 사흘은 된 후였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사러 갔다. 내가 도라지배즙을 넣어놓고 안 먹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아이돌 멤버의 개인 방송을 보다가 생각났는데, 마지막으로 마신 지 한 달은 된 것 같다. 부랴부랴 유통기한을 확인하니 아직은 한참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냉장고의 야채칸에 들어있다는 것. 내가 쓰는 냉장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라 문을 열면 가장 아래의 야채칸까지 한눈에 다 보일 법 한데 그게 그렇게도 보이지 않나 보다. 사실 이뿐만이 아니고 내가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일 중 하나는 냉장고 문 가장 아래 칸에서 유통기한을 넘긴 우유를 자주 발견한다는 것인데, 우유쯤은 유통기한을 넘겨 일주일까지 마셔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일을 자꾸 겪다 보니 우유를 사는 것을 자제하게 되었다.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시야가 이렇게도 좁은 것인지 이 문제에 대한 원인은 시간이 나면 좀 찾아보고 싶다.



 정리에 대한 의욕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냉장고 지도’라고 불리는 냉장고 식재료 리스트를 만들어 붙인 적이 있다. 냉장고 청소를 크게 벌려 싹 비워내고 새로 장을 봐 채운 직후였다. 야심차게 식재료 리스트를 만들고는 한동안 잘 써넣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새로 넣는 음식에 대한 리스트업을 게을리하다 슬그머니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허술하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루틴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역시나 실패한 것이다. 


 다시금 냉장고 지도를 작성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여름을 앞둔 나의 상황이 그렇지 않다. 실은 이번 여름엔 집에서 최대한 요리를 자제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 거창한 이유보다는 다른 계절보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자주 해야 하고, 특히 지난 여름 끔찍했던 날파리의 기억이 꽤나 강렬했다. 무엇보다도 더위에 지쳐서 어느 것 하나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여름날의 퇴근 후에는, ‘저녁식사’라는 일이 아주 단순하고 가벼운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여름의 ‘냉장고 운영 계획’(?)을 간단하게 세워보았다.



1. 종류는 단순하게

 내가 주로 사서 저장해 둘 음식은 생수, 과일, 단백질쉐이크 정도로 정해두고 가짓 수를 크게 늘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 냉장고에 뭐 있더라, 떠올리면 머리가 아득해지지 않도록. 이번 여름 자주 꺼내지 않겠지만 안고 갈 각종 소스류는 유통기한을 잘 체크해봐야 할 것 같다.


2. 요리는 하지 않고

 나머지의 썩고 있는 채소나 반찬 들은 점점 줄이는 중이다. 특히 언제 받았는 지도 까마득한 엄마표 반찬을 마주하는 것은 늘 괴롭고, 버릴 때도 그렇다는 걸 느낀다. 밥은 최대한 밖에서 먹으면서 날이 쌀쌀해질 때까지 요리는 하지 않는 것으로. 운동이 끝나면 서브웨이 샐러드나 사서 맥주와 마시기로 했다.



따라하고 싶은 플레이팅이 많지만, 정말 하고 싶은 때에만 하기로.


3. 탄수화물도 자제하는

 좋아하는 맥주를 많이 사두려고 하지 않는 이유라면, 많이 사서 냉장고에 쟁여뒀다간 매일 한 캔, 아니면 그 이상까지도 마셔댈 것 같은 우려에서였다(예전에 이미 경험했던 일이다. 마시고 싶을 때 한 캔씩, 그리고 좋아하는 디저트도 그날 먹을 양만(특히 치즈케익 전부, 혹은 마카롱 세트 사놓지 말 것!!!) 사 두기로.



 기억력이 크게 좋아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나의 병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진작에 접어두었다. 더 이상 내가 넣어둔 냉장고 속 음식이 골칫거리가 되지 않도록 나름의 방법을 선택했다면 어서 쫓아가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요리하지 않는 여름'이 될, 그리고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여름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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