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위에 가지런히 일군 사계절
할아버지의 노트에는 여전히 시계추가 돌아가고 있는 장이 있다. 바로 농사 일지다.
2025
5.26 모심기 (한 판 4,000)
모심기, *로터리, 이전 로터리 친 것 / 합 25만 지불
*로터리 : 밭 갈기
할아버지는 농사 일지를 2025년인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셨다. '고추 심었다.', '두불콩 심었다.' 날짜와 함께 무엇을 했는지 적혀있다. 기록은 다음 해 밭을 일구는 기준이 되었다. 알맞은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한 할아버지만의 지침서였다.
"아따~ 어찌 양파를 이렇게 크게 키웠소? 우리는 잘 안 됐는데."
지나가는 이웃 분께서 할아버지 밭에 있는 굵은 양파를 보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싱긋 웃기만 하셨다. 몇 년이 흐른 일이지만, 뿌듯함이 어려있던 따뜻한 미소가 아직도 기억난다.
건축학도였던 스무 살의 나는 조경도 잘하고 싶었던 욕심쟁이였다. 굳이 원예학과 전공 수업까지 자청해서 들었다. 하루는 외갓집에 가서 마늘 심는 일을 도왔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마늘 농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놀랍게도 할아버지의 모든 말속에는 수업 시간에 들었던 이론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무지했던 나는 그날로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졌다.
할아버지의 책장에는 늘 농업 관련 책이 꽂혀 있었다. 교육을 듣고 오시면 밭에 실제로 적용해보기도 한다고 하셨다. 힘들어 농사를 쉬어야 할지 모르는 나이에도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배우셨다. 거기에 오랜 경험까지 더해 긴 세월 논과 밭을 일구셨다.
할아버지는 밤 농사도 지으셨다. 가을이 되면 온 가족이 밤을 줍느라 주말마다 밤산에 올랐다. 밤 농사 일지는 자로 줄을 긋고 표를 만들어, 마치 엑셀 시트처럼 상세히 적혀 있다. 누가 얼마나 밤을 주웠는지, 그해 밤 수매 가격과 수입까지 정리되어 있다.
할아버지께서 고된 밤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셔서, 밤나무를 베고 고사리를 심었다. 밤 농사 기록도 2018년을 마지막으로 멈췄다. 수십 년 동안 친구처럼 오르던 산이었기에 그만큼 허전함도 깊었다. 익숙한 일상이 사라지자, 마음 한편이 빈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한동안 꽤 울적해 하셨다.
다행히 고사리에 대한 기록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그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셨을까. 축축하던 새벽 안갯속에서 고사리를 꺾던 시간이 노트에 남았다. 고사리 일지에는 고사리와 고추를 말린 농업용 건조기의 전기세도 적혀 있었다. 별의별 걸 다 적는 나의 성향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호미대신 펜으로, 노트 줄 위에 가지런히 농사를 지으셨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텃밭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노트를 하나 장만했다. 페이지마다 나만의 계절이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이 노트의 마지막장을 쓰게 되는 날엔, 할아버지가 유난히 그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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