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못다 한 효를 붓끝에 담아
할아버지는 수시로 선산에 가셨다. 선산에는 할아버지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의 묘가 있다. 지금이야 노쇠하셔서 자주 오르기 힘들어하시지만, 평생 하루에 한 번은 꼭 올라 문안을 드리셨다.
하루는 비가 많이 내리고 천둥번개가 쳤다. 다음 날, 할아버지께선 막내 외삼촌을 데리고 함께 선산을 오르셨다.
"아버지, 어머니. 많이 놀랐지요?"
할아버지는 조부모님, 부모님, 형과 동생의 묘 앞에서 차례대로 천둥소리에 놀라진 않았는지 다정한 인사를 건네셨다. 천둥이 치던 그 밤, 할아버지의 마음은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성인이 되기 전 어머니마저 떠나보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결혼하실 때,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이미 계시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늘 따뜻했던 어머니가 그리웠다. 해방 직후의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크게 기울었지만, 그 어려운 형편에도 어머니께서 용돈을 챙겨 주셨다. 열네 살 남짓이었던 할아버지는 삼십 리가 되는 고갯길을 넘어 시장에 갔다.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다가 고무신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비싼 흰 고무신을 처음으로 손에 쥔 할아버지는 뛸 듯이 기뻤다. 다 떨어진 헌신을 내다 버리고, 새로 산 흰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향했다. 삼십 리 고갯길도 뽀얗고 반질반질한 흰 고무신을 신고 있으니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반쯤 왔을까. 험한 산길을 걸어온 탓에, 갑자기 고무신의 뒤축이 떨어져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없는 돈 아껴가며 산 고무신이었기에, 아깝고 서러운 마음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한다. 눈앞을 가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마음에 맺힌 서러움은 80년 전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다.
할아버지가 18세가 되던 해, 어머니께서 장티푸스로 돌아가셨다. 병원을 가려면 도시인 진주까지 가야 했지만, 진주까지 가는 삯도, 병원비도 낼 형편이 못되었다. 약 한 번 쓰지 못하고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것이, 할아버지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당신 입에 들어갈 것 아껴가며 용돈을 챙겨 주셨는데, 아무것도 갚지 못했다. 어머니의 발에 흰 고무신 한 번 신겨 드리지 못했다. 약 한 번 지어드리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내드려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종이를 손수 엮어 '가정보감'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곳에는 기일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증조부모님부터 부모, 형제, 자식, 조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있다. 조상의 기일과 생년월일까지 잊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을까. 붓끝에 담겼을 그리움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참전용사로서 국립묘지에 묘를 마련할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선산에 있는 부모님 곁에 묻히기를 원하셨다. 살아생전 다하지 못한 효를, 늦게라도 다 하고 싶다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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