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함께 했던 이웃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이곳은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평생 살아오신 삶의 터전이다.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노트 속에 담겨 있다. 누가 결혼을 했고, 며느리를 맞이했고, 딸을 낳았는지, 장례를 치른 날까지. 날짜와 마을, 이름까지 적혀있다.
"이 분께서 이때 돌아가셨구나. 참 젊은 나이였네......"
할아버지의 노트를 보던 엄마께서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경조사란을 볼 때면 표현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스친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삶의 흔적이 그대로 담긴 생생한 역사였다.
흘려 쓴 글씨와 빛바랜 날짜 하나에도, 마을과 사람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정이 배어 있었다. 처음으로 인사를 온 수줍은 새 이웃과 아이가 태어난 집 대청마루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까지 떠오르는듯했다. 노트를 넘길 때마다 할아버지의 진심 어린 축하와 조용한 슬픔이 전해졌다.
한평생 함께 한 마을의 이웃들은 특별한 존재였다. 서로 돕고, 아이를 돌보고, 여행을 가기도 했다. 집을 짓고, 길을 닦고, 나무를 심는 일도 힘을 합쳤다. 그들은 동지이자 오랜 벗이었고, 생사고락을 나눈 가족이었다.
할아버지는 2019년 이후 경조사 적기를 멈추셨다. 힘에 부쳐 직접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어져 자식을 대신 보냈다. 먼저 떠나보낸 친구들의 이름을 직접 적는 일은 너무나 버겁고 괴로워서, 이제는 마음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은 오늘도 새로운 기쁨과 슬픔을 품고 흐른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다시 바라본다. 이제는 더 이상 노트를 펼쳐 경조사를 적진 않으시지만, 할아버지의 다정함은 여전히 마을 곳곳에 배어 있다. 이웃과 함께 웃고 울며 걸어온 길, 서로의 삶을 살뜰히 챙겼던 마음. 그것이 바로 할아버지가 새긴, 길이 남을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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