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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종이보다 오래 남을 할아버지의 가르침

by 한솔


여전히 글씨를 연습하고, 책을 읽으시는 할아버지 (2025.11)


지난여름, 외갓집이 큰 수해를 입었다. 다행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사하셨지만, 집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익숙한 많은 것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 와중에 먼저 떠오른 건 노트의 안부였다. 책장 위에 올려두었던 할아버지의 기록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감이 크게 밀려왔다.


10대, 20대, 30대. 나이가 달라질수록 노트를 읽는 마음도 달라졌다. 10대의 나는 단순히 신기하다는 마음으로 노트를 들여다보았고, 20대의 나는 오랜 기록이 지닌 귀함을 느꼈다.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노트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담아낸 가르침이라는 것을. 매사 최선을 다하는 자세, 카메라를 내려놓고 눈과 마음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법, 집을 가꾸는 마음가짐, 사람을 사랑하는 법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의 노트를 글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것은, 할아버지께 받은 사랑과 지혜를 조금이라도 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 한편에서 자꾸만 넘쳐흐르는 무언가를 조용히 붙잡아 두고 싶었다. 아마도 오래전 할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지금 이 시간을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오늘도 나는 그 노트를 천천히 펼쳐본다. 세월이 흘러도 종이에 배어있는 마음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사람과 시간, 진심을 소중히 여기는 삶 얼마나 따뜻한지. 그 모든 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 바로 내 할아버지라는 것을. 외할아버지의 기록은 종이보다 오래 남을, 인생을 바꿔줄 선물임을.

할아버지의 편지 (2022)

2025년 11월

외손녀 박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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