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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로 남긴 성장 앨범

그 시절, 어린 자식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방법

by 한솔


아내, 세 딸과 함께 (1968.9.25)


카메라는커녕 사진 한 번 찍는 것조차 너무나 어려웠던 시절. 외할아버지께선 소중한 아들딸들이 자라는 모습을 특별한 방법으로 간직하셨다. 자상한 오 남매의 아버지는 매년 자식들 앞에 노트를 펼쳤다. 어린 아이들에겐 이름이나 그림을, 큰 아이들은 글이나 감상을 남기라고 하셨다.



그 노트는 지금도 외갓집에 남아 있다. 1968년, 국민학교 1학년이던 우리 엄마의 서툰 그림에서 기록이 시작된다. 장을 넘길 때마다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이 글과 그림이 쌓여있다. 달라진 글씨체와 그림체만 봐도 해마다 자라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긴 아이들의 글 옆에 날짜와 이름, 그해의 나이까지 정성스레 적어두셨다. 자식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그 노트는, 할아버지에게 아마 무엇보다 소중한 성장 앨범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몇 학년, 몇 반인지. 그해의 친구 이름, 함께해 준 선생님의 성함까지 적어두라고도 하셨다. 아마도 먼 훗날 잊힌 시간을 또렷이 불러내는 선물을 남겨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1976년 중학교 3학년 엄마의 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중학생이던 엄마는 해마다 이 노트를 남기는 일이 성가신 숙제 같았다고 한다. 학교 숙제에 치이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이 앞서던 시절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엄마는 그 노트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다정한 마음을 떠올린다. 작은 손글씨 하나, 서툰 그림 한 장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그 정성이 이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고 했다.


80.12.16 막내아들 남근과


외할아버지는 자식에게 매 한 번을 드신 적도, 크게 꾸짖은 적도 없으셨다.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막내 외삼촌이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고 부모님을 불러오라 한 일이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께 처음으로 혼나겠구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지만, 할아버지는 외삼촌의 어깨에 손을 툭 올리신 것이 다였다. 그저 한 번 토닥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너그러움과 믿음이 담긴 손길이었다. 삼촌은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 자식에게 한 없이 다정했던 할아버지가 존경스럽다.


할아버지는 글씨와 그림으로 자식들의 모습을 붙잡아 두셨다. 그저 한 해 한 해 쌓아 올린 기록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자라는 아이들을 놓치고 싶지 않던 한 아버지의 사랑이 고요하게 스며 있다. 그 묵묵한 사랑이야말로 우리 집안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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