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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Oct 04. 2019

17. 군입대

내가 고등중학교에 다니던 당시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였다. 1992년 8월, 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학급에서 성적이 2등쯤 되고 전교 10위권에는 들어가 “김형직사범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러나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이 북한군 최고사령관이 되면서 내 꿈은 무너졌다. 북한 전역에서 당이 주도한 “집단탄원”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집단탄원은 학교 졸업생 전체가 북한군에 입대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 한 명 나서서 “최고사령관 동지를 위하여 우리 학급이 집단탄원하자”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이 되고나서 “90년대에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자”는 노동당의 구호가 나왔다. 90년대에는 조국통일을 완수한다며 전쟁광풍, 집단탄원 열기가 북한 전역을 덮었다. 



그런 마당에 까딱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역적이 되는 수가 있다. 당시 졸업을 앞둔 북한 고등중학교 졸업반 학생들 가운데 청년동맹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이 '집단탄원' 바람잡이에 나섰다. 평소에 학습소조(동아리) 학생들을 “군대 가기 싫어서 공부 하는 것”들이며 질시하던 일진 애들, 이 애들이 문제였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체육소조나 음악소조에서 기웃거리며 흡연하고 여학생들과 연애하면서 면학 분위기를 흐리던 애들이 극성이었다. 배운 거라곤 쌈박질밖에 모르던 애들이 집단탄원 주장에 앞장섰다. 어차피 공부를 못하니 대학 진학은 코집이 글렀고 군대에 갈 수밖에 없는 애들이었다. 어차피 나가는 군대인데 “집단탄원” 해서 가게 되면 충성심이 높다고 평가되는 것이었다. 그 통에 녹아나는 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려고 생각했던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군사국가인 북한에서 군대 나갈 각오쯤은 다 돼있던 터라 마음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고등중학교 5학년 때쯤부터 미리 선발하는 “호위사령부” 초모 대상이었기에 마음을 비웠다. 대학에 가고는 싶지만 집단탄원을 한다고 학급 청년동맹 초급단체회의에서 결정했기에 군 입대는 기정사실화 된 것이었다. 그나마 호위사령부는 김일성 경호부대로 당시까지만 해도 위세가 대단했다. 호위사령부 군인들은 가죽장화에 승마복을 입고 인민무력부에서는 장교들만 걸치는 가죽 혁띠도 띠고 다닌다. 또 주석궁이나 특각, 초대소, 중앙당 청사 같은데서 근무하고 제대될 때에도 노동당입당을 하고 좋은 대학에 추천받아 와 출세가 확실히 보장되는 부대였다. VIP경호부대라 출신성분과 토대도 엄청 깐깐하게 따졌다. 6촌까지 친, 인척에 대한 신원조회는 물론 담임선생의 보증과 마을 인민반장의 평가서까지 받는다. 



고등중학교 4학년 때 호위사령부 초모대상자로 선정된 나도 신원조회를 걸쳤고 드디어 최종합격 됐다. 사실 신체검사 시력테스트와 팔 관절에 문제가 있었다. 불합격 위기에 처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돼 군대에 나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그 당시 북한 사회의 분위기는 군대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돼 떨어지면 '못난 남자'로 보는 시선이 다분했다. 마치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결국 나는 고급담배 2갑을 급히 사다가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의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뇌물' 덕분에 신체검사에 겨우 합격했고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 훗날 군복무가 힘들때 마다 그때 괜히 뇌물까지 바쳐가면서 군에 입대했다는 후회가 살짝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 정권의 선전 대로 6.25전쟁을 일으켜서 우리 '조국'을 삼키려 했고, 전후에도 수십년 동안 '반공화국 고립압살책동'에 '미쳐 날뛰는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을 쳐부시고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고 영웅이 돼 금의환향하겠다는 오기로 가슴이 불탔다. 이처럼 집단탄원의 열기 속에서 그해 8월 초 나는 온 가족의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떠났다.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열차가 떠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10년 동안이나 가족들 얼굴을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다. 


                                                                        중앙일보 사진 참조


내가 입대하고 2년 뒤 김일성이 사망했고, 북한에는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이 닥쳤다. 그 모든 위기가 제국주의자들의 반공화국 고립압살 책동, 제재 때문이라는 북한 정권의 변명이 이어졌다. 북한 군인들도 식량난의 피해자가 됐다. 부대마다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하고, 간염, 결핵 등 질병에 걸려 사망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때부터 부모들이 자식들을 군대에 내보내지 않으려고 신체검사 결과를 조작하는 일이 생기고, 군대에 보내더라도 덜 험하고, 덜 힘든 부대에 보내기 위한 뇌물 공세가 치열해 졌다. 자식들을 배웅하는 인사말도 달라졌다. 내가 군에 입대하던 90년대 초반에만 해도 "군사복무를 잘해서 꼭 노동당원의 영예를 안고 돌아오라"는 인사말이 대부분이었지만 90년대 중반부터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당부가 대세였다. 최근에는 초모생 환송식이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의 마당이 되면서 가족 외에 동창생이나 친구들은 될수록 참가하지 말라는 것이 인민보안성의 요구라고 한다. 특히 초모생들을 태운 열차가 떠날 때 ‘살아서 돌아오라’를 외치는 사람들은 ‘조국보위 의무’에 반기를 든 것으로 엄격한 법적 처벌이 있다는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   

군 입대 후 여러 해가 지나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동창생들의 소식을 들었다. 군복무하기 싫어서 공부한다고 공부 잘하는 애들을 그렇게도 헐뜯고 못살게 굴던 일진 애들 대부분이 군복무를 제대로 못해서 생활제대(처벌제대) 되거나 영양실조 걸려서 집에 와 있었던 반면 그 애들한테 그런 질시를 받던 학습소조 애들 중 절반이 군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때는 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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