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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e Aug 22. 2019

2. "에덴"에서 태어나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으며

나는 “에덴”에서 태어났다. 세상은 그것을 부정했어도 그 곳을 통치하는 위정자들의 주장은 적어도 그러했다. 그곳에서 태어나 살 때는 그네들이 “낙원”이라고 하니 그런 줄만 알았었다. 물론 떠나오기 직전에는 달랐지만 유년시절과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청춘시절의 대부분은 그런 줄 믿고 있었다. 

북한 대집단체조 '아리랑'

내 고향은 한반도 북단의 한 광산마을이다. 한반도의 북변을 감돌아 흐르는 두만강이 고향 마을 앞을 지났다. 강 건너편은 당시만 해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중국 땅이었다. 그 곳에서 내가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던 때는 북한에서도 격변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시기였다. 




내가 태어나기 꼭 1년 전, 그러니까 엄마 배속에 있을 때인 1974년 2월, 김일성은 노동당 제5기8차 전원회의에서 6개년계획의 조기완수를 위하여 이른바 “사회주의 대건설방침”을 내놓는다. 이에 따라 1975년 8월말까지 노동력 동원이 한창이었다. 여기에는 대학생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건설, 임업 등 어려운 노동현장에 나가 열심히 땀을 흘리는 대학생들 속에는 나의 부친도 있었다. 최전방 개성지역의 북한군 2군단에서 10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부친은 당시 나진해운대학 학생이었다. 제대 후 대학에 추천받아 재학 중에 중매로 모친을 만나 결혼하셨다. 


                                                                   출처: 북한 뮤직비디오 '축복하노라'


나진(지금의 나선시)은 내 고향에서는 백수십리 떨어진 곳이어서 부친은 대학 기숙사 생활을 하셨다. 모친은 홀로 시집살이를 하셨고 그 와중에 나를 낳으셨다. 부친이 독자여서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온 집안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의 식량상황은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북한보다 더 어려웠던 중국 쪽에서 식량을 얻어가곤 했다. 


할머니는 장손인 나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셨다. 애지중지 그 자체였다. 불면 날아갈세라 서면 넘어질세라 그렇게 나를 보살피고 먹이고 키우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던 그 시절이 내겐 유일한 에덴의 날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고 속 편한 유년이 그 누구에게나 에덴의 삶일 것이다. 그렇게 고향에서 5년, 부친이 평양 교외의 한 국립연구소에 배치를 받으면서 나는 이사를 가게 됐다. 고향에서의 유년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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