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날, 하늘의 오차 없는 시계와 뒤틀린 계절

by 비움과 채움

계절의 시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갑니다.

조석으로 기온이 선선해지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절기상 백로가 찾아왔습니다. 이슬점이 내려가 풀잎마다 흰 이슬이 맺히는 때, 하늘은 높아지고 푸른빛이 깊어지며 여름의 흔적은 사라져야 할 시기입니다. 포도가 제철을 맞고, 밤송이가 벌어지며 알밤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풍요의 계절로 들어서는 문턱입니다.


옛사람들은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을 늘인다” 하며, 백로날의 비를 풍년의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올해 백로날의 하늘은 달랐습니다. 경상도 지방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마을과 들판이 물바다가 되었고, 같은 날 강릉 지방은 극심한 가뭄으로 제한급수라는 절박한 소식을 맞아야 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절기 안에서도 누군가는 물을 견디지 못해 울고, 또 다른 이는 물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모순의 풍경.


계절의 시계는 변함이 없는데, 그 속을 채우는 하늘의 날씨는 점점 오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풍년을 약속하던 비가 재앙으로 변하고, 가뭄의 땅은 갈라진 채 농부들의 마음을 함께 메마르게 합니다. 백로의 이슬은 더 이상 고요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기상이변이라는 현실의 경고음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농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내린 비와 바람을 농부의 마음으로 해석해 왔던 우리의 오래된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뜻을 읽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변덕스러운 기후 앞에 농심도, 천심도 길을 잃고 있습니다.


백로의 맑은 하늘을 기대하던 마음이, 재해와 갈증 사이에서 흔들리는 오늘. 계절의 시계는 여전히 정확하지만, 그 시계 속에 담긴 계절의 얼굴은 점점 낯설고 무겁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기후 위기의 징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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