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여름의 자취를 바람으로 지워 갑니다. 땀방울처럼 번져 있던 더위의 흔적을, 걸레질하듯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총채질하듯 흥겹게 털어냅니다.
그렇게 자국 하나, 그림자 하나가 지워질 때마다 계절은 새 옷을 입겠지요.
빈자리는 황금빛으로 여문 곡식들이 채워지고, 나뭇잎들은 오색 물감으로 물들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더 높아지고, 그 위로 흘러가는 양떼구름은 흰색 음표처럼 계절의 악보를 수놓을 것이고, 바람은 그 음표들을 지휘하는 손길. 바쁘지만 다정하고, 분주하면서도 따뜻하겠지요.
나는 압니다.
그 바람 속에 담긴 초대의 뜻을.
“이제 즐기셔도 좋습니다”라는 그 한마디가 내 귓가에 닿는 순간, 가을이 비로소 내 안에서 열린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설렙니다.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올 바람 한 줄기를 기다리며, 마치 첫 전시회 앞에 선 관람객처럼 두근거립니다.
가을은 알까요?
이 기다림이 단순한 계절의 기다림이 아니라는 것을.
쓸쓸함 속에서도 다가올 풍요를 믿는 마음, 비워내며 채우는 삶의 질감을 느끼려는 갈망, 그 모든 것을 담은 설레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
가을의 초대장을 품에 안은 채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