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잔잔히 내리던 빗줄기는 이내 굵어져 유리창을 두드렸고, 외출길이 괜히 번거로워질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문득 고향 친구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혹시 농사에 피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친구의 목소리는 나의 걱정과 달리 유쾌하고 여유로웠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지. 난 지금 호박전에 막걸리 한잔하고 있어.”
그 한마디에 순간 귀가 번쩍 열렸다. 호박전에 막걸리라니. 기름에 노릇하게 구워지는 호박전의 구수한 냄새와 누룩 막걸리의 깊게 숙성된 맛이 머릿속과 혀끝에 번졌다. 도시에서 외출을 준비하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한가롭고 풍요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오면 농사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가을비 벼 서말이라는 말 몰라? 벼가 여물어 가는 이 시기에 비가 와야 낟알이 알차게 차. 결국 풍년으로 이어지는 거지. 이 비는 우리한테는 고마운 비야.”
순간 멈칫했다. 내게 비는 그저 우산을 챙기고 신발이 젖는 성가신 존재일 뿐인데, 농부에게는 한 해 농사의 성패를 가르는 축복이라니. 친구의 목소리에는 그 믿음과 감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비의 의미가 전혀 다른 빛깔로 다가왔다.
도시의 빗길은 늘 불편하다. 차는 막히고 신호등은 성가시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농촌의 빗길은 다르다.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며 알곡을 채워가는 시간이 되고, 흙냄새가 짙어지는 순간이 된다. 농부에게 비는 하늘이 내려주는 또 하나의 거름이자 약속이었다.
친구는 부침개를 부쳐내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염려가 어느새 부러움으로 변했다. 부침개가 기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는 풍경. 그 아래에서 막걸리 잔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소박한 자리. 그것은 도시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쉽게 가질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전화를 끊으며 나는 농담처럼 말했다.
“젓가락 들고 달려갈 테니까 막걸리 남겨둬라.”
하지만 속마음은 진심이었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달려가, 비 내리는 들녘을 바라보며 툇마루에 앉아 친구와 전을 나눠 먹고 싶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도시의 도로 위에서는 귀찮음이었지만, 친구의 들녘 위에서는 풍년을 약속하는 축복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그 차이를 곱씹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한 건 막걸리나 전의 맛이 아니라, 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농부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