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들여다보니 오늘이 바로 추분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오늘은 낮과 밤의 키가 똑같아진단다. 내일부터는 낮의 키가 줄고 밤의 키가 커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옆에 있던 형은 “궁금하면 낮과 밤을 직접 재보라”며 나를 놀려 댔다.
지금 돌이켜보면, 해가 기울어 가는 시간을 굳이 자로 잴 수 없는 일임에도, 그 순진한 질문 속에는 계절을 배우고 삶의 이치를 깨우쳐 가던 어린 날의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추분
농부들에게 이 절기는 본격적인 가을걷이의 신호였다.
밭에서 자라난 곡식과 채소가 하나둘 수확되며, 창고가 채워지고, 장터가 풍성해졌다.
그 시기에는 천둥과 벼락 소리가 잦아들고, 풀벌레는 땅속으로 숨어들며, 논두렁의 물줄기도 점차 말라갔다.
자연의 변화는 곧 생활의 변화였고, 농촌의 달력은 절기에 따라 조율되었다.
추분은 단순히 낮과 밤의 균형을 의미하는 날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가을로 옮겨가는 이정표였다.
추분
이 날이 오면 형제들이 모여 즐기던 놀이도 떠오른다.
바로 ‘계란 세우기’였다.
춘분과 추분 무렵이면 달걀이 신기하게도 곧잘 세워진다 하여, 마루에 모여 앉아 달걀을 하나씩 바닥에 조심스럽게 세워보곤 했다.
나는 번번이 실패했지만, 형은 능숙하게 세워 올리며 우쭐해했다. 그저 장난 같던 놀이 속에 사실은 지구의 기울기와 중력의 균형 같은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그것은 단순히 신기하고 즐거운 놀이였을 뿐이었다.
추분
이제는 본격적인 가을의 길목에 서 있다.
낮과 밤의 키가 같은 오늘, 나는 문득 어릴 적 그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어본다.
낮의 키와 밤의 키를 다시 재어본다고 해서 결과가 눈에 보일 리는 없지만, 그 마음가짐 자체가 계절을 맞이하는 의식 같다.
오늘 하루, 나는 낮과 밤의 균형을 내 삶 속에서도 찾아보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추분이 전해주는 가장 큰 가르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