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에 이른 아침이 묻어 있었다.
소청산장에서의 밤은 유난히 깊었다.
바람은 봉우리들을 훑고, 별빛은 이불처럼 우리를 덮었다.
이제 하산의 길을 잡는다.
발걸음은 산을 내려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능선을 따라 조금 내려서자, 설악의 허리에 품은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봉정암.
수없이 올랐던 산, 그러나 이곳에 서면 늘 새롭다. 천 년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듯 고요한 돌담과 작은 법당.
바람에 실려 오는 목탁 소리가 묵묵히 속삭인다.
“머물렀던 길, 내려가는 길 모두가 수행이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차 한 모금의 온기를 입에 담는다. 그제야 몸도 마음도 풀린다.
《봉정암(鳳頂庵)》
봉정암은 설악산 깊숙한 곳, 해발 1,200m가 넘는 능선 위에 자리한 작은 암자입니다.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세웠다고 전해지지요. 이름 그대로 ‘봉황이 머무는 꼭대기’, 그만큼 신령하고 고요한 기운이 감도는 곳입니다.
대청봉을 넘어 소청대피소를 지나야 닿을 수 있어 길은 쉽지 않지만, 그래서 더 특별합니다. 봉정암 마당에 서면 발아래 천불동 계곡이 펼쳐지고, 멀리 공룡능선과 울산바위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구름이 걸리면 하늘 위에 떠 있는 듯 아득하고, 맑은 날이면 설악의 산줄기가 그림처럼 드러나 숨이 멎을 만큼 웅장하지요.
오랜 세월 불자들이 문수보살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던 자리이자,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호흡을 고를 수 있는 쉼터입니다. 봉정암을 오르는 길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다시 채우는 작은 순례에 가깝습니다.
> “봉정암에 닿는 순간, 산을 오르는 이유가 문득 마음속에서 답처럼 올라옵니다.”
다시 길을 잡아 오세암으로 향한다.
길은 깊은 숲으로 이어지고, 계곡이 우리 곁에서 낮은 숨을 쉰다.
안개가 스며드는 숲은 한층 더 고요하다.
오세암에 닿자 작은 처마 아래로 햇살이 흘러내린다.
이곳엔 오래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다섯 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
세상은 언제나 험하고 가혹하지만, 그 속에서도 맑음을 잃지 않았던 영혼의 흔적이 오늘의 우리를 위로한다.
조용히 발을 옮기면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한용운 님의 명시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명시들을 읽다 보면 절로 나라사랑 애국자가 되어있다.
《오세암(五歲庵)》
오세암은 설악산 깊은 품속에 자리한 작은 암자입니다. 이름처럼 ‘오세’, 다섯 살의 순수한 마음을 닮은 이야기로 전해지는 곳이지요.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수도하며 세웠다고 전해지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많은 수행자들이 머물렀습니다.
특히 이곳은 한 아이의 전설로 유명합니다. 오래전, 부모를 잃은 다섯 살 아이가 스님과 함께 머물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 전해져, 오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 순수함과 슬픔이 뒤섞인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암자는 설악산 북쪽, 향로봉을 지나 만나는 깊은 산중에 있습니다. 길은 한적하고 고요해, 걷다 보면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산 안개가 피어오르면 세상과 떨어져 있는 듯, 마음까지 고요해집니다.
오세암은 단순히 불교적 성지일 뿐 아니라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이는 공간입니다. 누구든 한 번쯤은 이 고요 속에 자신을 맡기고 싶어질 만한 곳입니다.
> “오세암의 고요 속에서는 슬픔마저도 맑아집니다.”
걸음이 즐겁다.
걷다 보니
영시암이 문득 나타난다.
‘영시(永始)’라는 이름처럼, 시작과 끝이 맞닿아 하나의 원을 이루는 듯하다.
이제 긴 여정의 마무리를 향해 백담사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길은 점점 넓어지고, 바위와 계곡은 어느새 부드러운 숲길로 바뀐다.
마침내 백담사의 일주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던 물소리가 고요를 깨우며 우리를 맞이한다.
천년 세월을 견뎌온 법당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담담하다.
그 담담함이 지친 마음을 감싸 안는다.
이곳에서 한용운 님께서 나라를 잃고 애타는 심정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녹여 그 유명한 님의 침묵을 쓰셨으리라.
"아 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여기서 난 길을 내려놓고, 묵직한 산의 시간을 품에 안은 채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백담사(百潭寺)》
설악산 서쪽 깊은 계곡, 백담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큰 사찰입니다. 이름 그대로 ‘하얀 연못(白潭)’이 있었다 해서 백담사라 불립니다. 계곡 물이 맑고 바위가 희어서 붙은 이름이지요.
이곳은 신라 말기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처음엔 한계사(寒溪寺)라 불리다가 조선 숙종 때 크게 중창하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행과 기도의 도량으로 이어져 왔고, 오늘날에도 불자들이 찾는 대표적 명소입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출가해 수행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불교적 사유를 깊게 하고 훗날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나아갔다는 이야기는 사찰에 특별한 의미를 더합니다. 또한 근현대사에서는 법정 스님과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인연으로도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사찰로 가는 길은 평화롭습니다. 설악산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계곡을 따라 7km 정도 올라가면 도착합니다. 가을이면 단풍이 계곡을 물들이고, 여름에는 맑은 계곡물이 발길을 시원하게 맞아 줍니다.
백담사는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산과 계곡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경내에 서면 산새 소리와 물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마음이 절로 고요해집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앞에 서면 설악의 깊은 품이 느껴집니다.
> “백담사는 화려함보다 고요함으로, 말보다 침묵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마지막으로 셔틀버스에 올라탄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계곡물과 마약 물들기 시작하는 붉게 물드는 단풍이 마치 긴 여정에 대한 작별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저 아래 용대리가 가까워질수록, 발걸음 대신 가슴이 천천히 내려간다.
산 위에서 쌓였던 땀과 고요, 봉정암의 울림, 오세암의 순수, 백담사의 평화가 뒤섞여 한 줄기 바람이 된다.
그 바람을 품고 다시 일상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