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향기와 아버지의 벌통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머물던 자리를 이제는 밤꽃 향기가 대신한다. 짙고 독한 밤꽃 향은 유난히도 진하다. 그 향이 코끝을 간질일 때면, 나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밤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벌통을 옮기셨다. 마당 한켠 밤나무 아래 벌통을 내려놓고, 한참을 그 앞에 서 계시곤 했다. 만발한 밤꽃 주위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꿀벌들, 꽃에서 꿀을 모으고 벌통으로 들락날락하는 그 풍경은 아버지에게 가장 흐뭇한 시간이었으리라.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밤꽃 향은 너무 독해서 나무 아래 오래 머물면 머리가 띵해진다고. 하지만 그 독한 향이야말로 벌을 유혹하는 힘이었고, 밤꽃의 수꽃과 암꽃이 수태를 이루는 비밀이었다.
시간이 흘러 수꽃이 하얗게 바닥에 떨어지고 나면, 밤나무 가지마다 송알송알 어린 밤송이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는 벌통을 조심스레 열어 꿀을 거두셨다.
밤꿀은 특별했다. 진하고 깊은 단맛, 그런데 왠지 모르게 정신이 멍해질 만큼 강렬했다. 아버지는 절대 한 숟가락 이상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는 그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몇 숟가락을 퍼먹곤 했다. 그리고 종일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기억. 독한 꿀이었다. 어린 입맛에도 잊을 수 없는 강한 맛이었다.
지금도 흐드러지게 핀 밤꽃을 보면, 그 시절의 꿀맛이 그립다. 아버지의 벌통과 밤꽃 향기, 그리고 몰래 떠먹었던 밤꿀의 추억은 내 마음 깊숙이 각인된 초여름의 한 페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