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라던 회초가 긴 여행을 다녀온 사이 말라버린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식물을 키우는 일에서 한 발 물러섰다.
그럼에도 거실 한가운데,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빈자리는
이상하리만큼 삭막했다.
결국 나는 다시 인터넷을 뒤적였다.
‘게으른 사람이 키우기 좋은 식물.’
이 문장은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구원처럼 보였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고, 햇빛이 부족해도 괜찮고,
여행을 가도 버틴다는 설명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산세베리아, 스투키, 스킨답서스, 테이블야자….
이름들은 점점 안심의 목록이 되었고,
나는 그것들을 메모하며 마음속으로 계산했다.
얼마나 적게 돌봐도 괜찮을까,
얼마나 신경 쓰지 않아도 살아줄까.
조금 더 들여다보니
이 식물들조차 완전한 방치는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이 보였다.
아무리 음지식물이라 해도 빛은 필요했고,
물을 적게 준다 해도 시기는 지켜야 했다.
통풍이 없으면 뿌리는 썩고,
관심이 없으면 신호를 놓치게 된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 순간, 생각이 멈췄다.
나는 식물을 키우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 있는 무언가를 집 안에 ‘두고’ 싶었을 뿐이다.
초록의 색감, 잎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공기 정화라는 이름의 위안,
그리고 내가 뭔가를 잘 돌보고 있다는 착각.
노력은 최소로, 만족은 최대로.
그 계산식 끝에 놓이는 존재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화분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말라버린 식물이 남긴 빈 화분이었다.
흙 위에 남은 줄기와 뿌리의 흔적은
내 욕심의 결과처럼 보였다.
그 식물은
여행도, 바쁨도, 피곤함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주어지지 않은 물과 빛을 기다리다
조용히 스스로를 접었을 뿐이다.
그때 깨달았다.
게으른 자가 식물을 기른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일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한 채 생명을 곁에 두려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식물은 장식이 아니고,
초록은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며,
‘잘 안 죽는다’는 말은
‘죽어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다시 들이지 않기로 했다.
화분 하나 없는 거실은 여전히 허전하지만,
그 빈자리는 적어도 죄책감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언젠가 내가 부지런해질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누군가의 생을 돌볼 각오가 생긴다면
그때 다시 흙을 만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 선택으로
그나마 생명 앞에서 정직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