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짱 도루묵이 아닌 진짜 도루묵

by 비움과 채움

점심시간, 친구는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라며 나를 이끌고 계절음식을 내는 실비집으로 들어갔다. 큼지막한 메뉴판에는 도루묵찌개, 도루묵구이, 도루묵조림, 도루묵찜이 큼직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찌개와 구이를 주문했다. 도루묵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마주하는 이름이다.


어릴 적 겨울이면 동네에 도루묵 장수가 들어오면 어머니는 알이 통통하게 밴 녀석을 유심히 골라 사 오셨다. 숯불 위에 올리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노랗게 부풀던 알이 터질 때면 아이였던 나는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무를 넉넉히 넣고 끓여낸 도루묵국은 온 가족을 한 상에 모이게 하던 겨울의 맛이었다. 그 시절의 도루묵은 그 자체로 별미였다.


도시 한복판에서 다시 만난 도루묵은 냄비째로 등장했다. 냄비 바닥엔 무와 양파가 깔리고, 그 위에 살이 통통하고 알이 불룩하게 밴 도루묵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상 위에는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생강즙을 섞은 양념장이 준비돼 있었다. 빨리 끓기를 바라며 냄비를 들여다보는데, 주인장이 웃으며 한마디 덧붙인다. “너무 오래 끓이면 알이 딱딱해져요.” 도루묵은 기다림에도 요령이 필요한 생선이었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즈음, 석쇠째로 도루묵구이가 나왔다. 굵은소금을 뿌려 노릇하게 구운 도루묵, 터져 나온 알의 모습은 어린 시절 기억 속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뼈가 연해 통째로 씹어 먹어야 제맛이다.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옆 테이블에서는 도루묵조림이 끓고 있었다. 찌개보다 국물을 적게 잡고 감자와 시래기를 넣어 자작하게 끓고있는 모습에 괜히 침이 넘어간다. 주인장은 다음엔 찜도 꼭 먹어보라며 귀띔한다. 콩나물과 미나리를 듬뿍 넣고 전분물을 풀어 매콤하게 쪄내는데, 아귀찜과 비슷한 방식이라 한다. 다음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


벽 한편에는 도루묵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도루묵은 겨울이 제철인 동해안 대표 어종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에서 12월 사이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몰려드는데, 이때 잡힌 도루묵은 알이 꽉 차고 살에 기름이 올라 가장 맛이 좋다. 단백질과 지질히 풍부하고, DHA 함량이 높아 혈관 건강과 기억력에도 도움을 준다고 적혀있다.


이름의 유래도 흥미롭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길에 이 생선을 맛있게 먹고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했지만, 환궁 후 다시 먹어보니 예전만 못해 “도로 묵이라 부르라” 했다는 이야기에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애쓴 일이 허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는데, 도루묵의 유래가 참으로 재밌다.


하지만 오늘 점심의 도루묵은 결코 말짱 도루묵이 아니었다. 김이 오르는 냄비 앞에서 친구와 마주 앉아 웃음을 나누고, 오래된 기억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시간. 추운 겨울에만 허락되는 이 생선은 맛보다도 추억으로 더 깊게 남았다.


가게를 나서며 다음엔 꼭 도루묵찜을 먹으러 오겠노라고 주인장에게 덕담을 건네며 나왔다.

겨울은 그렇게, 말짱 도루묵이 아니라 진짜 도루묵을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찹쌀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