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동 골목을 걸었다.
겨울 끝자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골목은 여전히 사람의 온기로 채워져 있었다. 오래된 간판과 나무문, 세월의 흔적이 남은 벽돌 사이를 지나며 문득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인사동에 간 이유는 선배님의 전시회 초대 때문이었다. 골목 사이에 자리한 낯익은 갤러리의 문을 열자, 선배님이 환한 얼굴로 맞아주셨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자연스럽게 작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의 주제는 ‘예스러움이 좋다’였다.
벽에 걸린 흑백 사진들은 소리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초가집의 마루, 바람에 삐걱거리던 사립문,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장독대,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 가슴에 손수건을 단 채 코를 훌쩍이던 어린 얼굴들…. 소달구지가 지나가고, 논에서는 써레질이 한창이고, 물레방앗간에서는 물소리가 끊이지 않던 풍경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 80년대의 어느 날로 돌아간 듯했다. 설명을 해주는 선배님의 얼굴에는 잔잔한 행복이 떠올라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이 전시가 얼마나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준비되어 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선배님은 말씀하셨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옛것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고. 그것은 단지 낡은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던 삶의 지혜와 정서,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던 흔적들이 함께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 전시를 열게 되었다고 했다.
잊히기 전에 한 번 더 바라보고,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젊은 시절 함께 단체전을 준비하던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밤늦도록 작품을 걸고, 서로의 사진을 두고 열띤 토론을 하던 시절.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 역시 어느새 그 시절의 공기 속으로 잠시 걸어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선배님은 다음 전시의 구상도 조심스럽게 들려주셨다.
옛것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사라짐과 이어짐, 그 사이에서 길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했다.
전시장을 나서며 도록 한 권을 들고 골목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며 인사동 거리에 노란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그 빛 아래를 걷다 보니, 이곳 역시 수많은 시간과 이야기를 품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깊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깊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할 때,
비로소 옛것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