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앞 글판

by 비움과 채움

우리 동네 꽃집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이 잠시 느려진다.

유리문 옆에 세워둔 작은 칠판 때문이다.


봄이면 연둣빛 분필로 “봄이 왔어요”라고 쓰여 있고,

여름이면 “수국이 가장 예쁜 계절입니다”라는 문장이,

가을이면 “국화 향기가 깊어지는 때”라는 글이,

겨울이면 “따뜻한 꽃 한 송이가 마음을 녹입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계절이 바뀌고 절기가 지나고, 국경일과 작은 기념일이 오갈 때마다

그 글판의 문장은 조용히 바뀐다.

마치 뉴스의 헤드라인처럼,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고

읽고 나면 계절이 한 걸음 움직였음을 알게 된다.


며칠 전부터 그 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졸업식 꽃다발 예약을 받습니다.”


아, 졸업시즌이구나.

그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2월의 공기와 교정의 풍경,

학사모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네 군데의 대학이 모여 있다.

그래서 졸업철이 되면

어느 학교 졸업식이 언제인지 자연 알게 된다. 가장 먼저 알게 해 주는 사람들은

꽃을 파는 사람들이다.


새벽 지하철 입구에서

꽃다발을 팔기 위해 자리를 잡으려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차가운 바닥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 많은 꽃을 누가 다 사 갈까.

팔지 못한 꽃은 어떻게 될까.


꽃은 아름답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버리는 물건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요즘은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졸업식 꽃 예약받습니다”라는 문장이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제 졸업식 꽃다발도

미리 준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약을 하면

졸업생이 좋아하는 색을 고르고,

학교의 상징색을 맞추고,

포장지와 리본까지 고를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꽃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꽃을 준비하는 일,

그날을 기억하게 할 하나의 선물을 만드는 일로 의미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집으로서도

필요한 만큼 준비할 수 있고

버려지는 꽃을 줄일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방식일 것이다.


글판 아래에는

이런 문장이 하나 더 적혀 있었다.


“주문 시에는 3일 전에 꼭 예약해 주세요.”


그리고 그 아래,

전화번호가 굵고 진하게 쓰여 있었다.


아마도 그 번호로

누군가는 부모의 마음으로,

누군가는 친구의 마음으로,

누군가는 조용한 축하의 마음으로

꽃다발을 예약하고 있을 것이다.


꽃집 앞을 지나며

나는 잠시 그 글판을 다시 바라보았다.


계절은 이렇게 오고,

사람의 시간도 이렇게 흐른다.


그리고

"꽃은

언제나 그 경계에서

조용히 한 순간을 밝혀 주고 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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