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여울

by 비움과 채움

개여울, 익숙한 노래가 들려온다.

그 익숙한 노래에 이끌려 단박에 타임머신에 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1973년으로.


국어 수업 시간, 교실 창밖으로는 바람이 불고 있었고 분필 가루가 희미하게 날리던 오후였다.

그날 우리는 소월의 시 「산유화」를 배웠다.

산속에 홀로 피었다가 홀로 지는 꽃. 선생님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해 주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홀로’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외워 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무조건 외웠다.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문장들은 이상하리만큼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즈음 형이 읽던 소월 시집 『진달래꽃』을 펼쳐 보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시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진달래꽃」, 「초혼」, 「먼 후일」, 「엄마야 누나야」, 「가는 길」, 그리고 「개여울」 등. 읽고 또 읽고, 외우고 또 외웠다.

시는 나의 비밀스러운 친구가 되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사춘기의 감정들, 이유 없이 예민해지고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혼자라는 생각이 깊어지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을 시가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맑고 담백한 목소리. 소월의 시 「개여울」에 곡을 입혀 부른 노래였다.

가수는 정미조였고, 그 곡이 그녀의 데뷔곡이었다고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

시로만 알고 있던 문장들이 선율을 타고 흐르자 마음 깊은 곳이 울렸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이미 줄줄 외우고 있던 시였기에 노래는 금세 내 것이 되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노래를 불렀다.

괜히 마음이 예민해질 때마다, 이름 모를 그리움이 밀려올 때마다 집 근처 개울가를 따라 걸으며 나는 혼자 중얼거리듯 노래를 부르곤 했다.

개여울의 물소리와 내 목소리가 섞이던 그 시간에는 세상이 여전히 낯설었지만, 시와 노래는 나를 다독여 주었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는 듯한 위로.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동반자처럼.


그 후 「진달래꽃」,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 소월의 시가 여러 곡 발표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 깊숙이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역시 「개여울」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노래가 들려오면 교복을 입고 걷던 소년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유 없이 감정이 요동치던 사춘기,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던 시절.

그때 나를 붙들어 주었던 것은 거창한 위로가 아니었다.

한 편의 시와 한 곡의 노래였다.

어쩌면 나는 그 시절을 시와 노래 덕분에 몸살을 덜하며 넘겼는지도 모른다.


산속에 홀로 피고 지는 꽃처럼, 개여울가에 홀로 앉아 있던 마음이었지만 시는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지금도 가끔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따라 읊조린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그 물음은 여전히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가장 따뜻한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죽겠다,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