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의 추억

사라진 등산화

by 비움과 채움

설악산 외설악 천불동 코스를 오르다 보면, 양폭산장이 나타난다. 그 산장을 마주칠 때마다, 내 기억 속 오래된 필름 하나가 돌기 시작한다. 흐릿한 화면 속, 나는 한껏 들뜬 청년으로 등장한다.


그 시절, 군 제대를 기념하여 이종 사촌형님이 선물해 준 등산화 한 켤레. 평소 양화점을 하던 형님이 큰 마음먹고 맞춰준 고급 가죽—당시엔 보기 드문 코도반 소재로 만든 등산화였다. 80년대 초, 등산화는 군화나 워커로 대신하던 시절이었기에, 이 등산화는 그야말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선배, 친구, 후배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던 그 신발. 내게는 단순한 장비를 넘어, 자랑이고 자부심이었다.


그 여름, 설악산 대청봉을 목표로 떠난 산행에서 양폭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하기 위해, 저녁을 마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소중한 등산화는 창가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른 새벽, 일어나 보니 등산화가 사라져 있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했지만, 산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산장지기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여분의 운동화가 하나 있다며 꺼내온 270mm짜리 신발 한 켤레. 내 발은 290mm. 앞부분만 간신히 들어갔고, 뒤꿈치는 도려내고 신었다. 마치 슬리퍼 같은 그 신발로 나는 희운각을 향해 올랐다.


하지만 운동화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중턱을 넘자 밑창이 갈라졌고, 나는 양말 두 켤레를 덧신고 희운각에서 대청봉을 오르고, 다시 하산하는 길에까지 그것에 의지했다. 양폭산장에 도착했을 땐, 양말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발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산길, 비선대 근처에서 귀면암 매점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나를 기억한 그는 어젯밤 설악동으로 내려가던 중, 내 등산화를 목에 걸고 빠르게 내려가는 청년을 보았노라 했다. 신발 주인은 분명 내가 맞는데, 다른 이가 그 신발을 가져가니 어딘가 수상했다는 아저씨. 내 사정을 듣고는 혀를 차며 한참을 안타깝게 쳐다보시더니, 고개를 돌려 올라가시며 다시금 몇 번이고 혀를 끌끌 찼다.


설악동에 내려왔을 때도, 내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한 약초가게 아저씨가 내 발을 보고 안타까웠는지 큼직한 고무신을 내어 주셨다. 그 고무신을 신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설악산을 찾았지만, 양폭산장 앞에 다다를 때면 항상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사라진 등산화 한 켤레, 피투성이 발, 그리고 낯선 이들의 따뜻한 시선과 마음. 설악의 바람 속엔 아직도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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