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지우기 시작하다

퇴직한 친구의 고백

by 비움과 채움

한때 나는 ‘갑’이었다.

사람들은 내 눈치를 봤고, 내 말에 맞장구쳤다.

회의도, 약속도, 식사 자리도 내가 정했다.

내가 웃으면 다들 웃었고, 내가 인상을 찌푸리면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그땐 그것이 리더십이라 믿었다.

존경받고 있다고 착각했다.

“선배, 언제 한번 뵈어요.”

“차장님, 역시 다르십니다.”

내 귀에 들려오는 말들이 곧 내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리’ 위에 쌓여 있던 허상임을 알게 된 건

그 자리를 내려온 뒤였다.


퇴직 후, 전화는 뚝 끊겼다.

카톡 창은 조용했고, “한번 보자”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명함이 사라지자

내게 웃던 얼굴들도 함께 사라졌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내 ‘자리’를 보고 있었단 걸.

그들의 고개는 숙인 게 아니라, 나는 그동안 눈을 감고 있었단 걸.


그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처음으로 밥 한 끼 하자고 말을 건넸다.

그 말 한마디 꺼내는 데,

왜 그렇게 심장이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혹시 거절당할까 봐,

거부당한 자의 쓸쓸함이 밀려올까 봐.


다행히 우린 밥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마주 앉아 나눈 웃음 하나, 말 한마디.

그게 그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숨 막히던 내 마음에

조금씩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안다.

자리는 빌릴 수 있어도, 마음은 빌릴 수 없다는 걸.

사람은 자리에 남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다는 걸.


그래서 요즘 나는

내가 잊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다.

“차 한잔 어때?”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

거창한 말 없이, 소박하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바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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