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날

입추날, 벼가 끄는 소리를 듣는다

by 비움과 채움

입추날이면

기억은 어릴 적 늘 논두렁 한 귀퉁이로 나를 데려간다.

하늘은 한층 높아지고,

바람 끝엔 어느새 가을의 냄새가 섞여 있던 그 논두렁으로.


입추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논으로 향하셨다.

그날도 아침부터 들녘은 이슬에 젖어 있었고,

햇살은 부드럽게 쏟아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논두렁에 앉으시더니

내게도 자리를 내주셨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봐라.”

나는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들려오는 건 바람소리,

풀벌레들의 가느다란 노래뿐.


“벼가 쑥쑥 자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 말이 너무 낯설고, 너무 신기해서.

“그 소리에 놀라 개도 짖는데, 너는 들리지 않니?”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벼가 소리를 낸다는 게

어린 나에겐 마치 옛날이야기 속 동화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진지하셨고,

그 속엔 바람보다 깊은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지금에야 안다.

그 소리는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것이라는 걸.

이삭 하나하나가 맺기까지

햇살을 견디고, 바람을 견뎌낸 벼의 속삭임을.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가족을 위해 묵묵히 땀을 흘린 아버지 같은 사람일 것이다.

벼가 쑥쑥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가을걷이를 무사히 마치고

이밥 한 그릇 차려낼 수 있기를 바라는

농부의 기도 같은 것.


입추가 오면, 나는 여전히

그 논두렁에 앉아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날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벼는 조용히,

분명히 쑥쑥 자라고 있는 그곳에.


입추,

그 이름만으로도

자연은 계절의 문턱에 서고

사람들은 마음속의 풍년을 꿈꾸리라.


입추,

들판 너머

논두렁에 앉아

귀가 크게 열린

아들을 바라보며

궐연을 말아 피우시던

아버지가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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