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날, 검둥이를 생각하며
강가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온 어느 여름날, 집안은 고요했다. 늘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들던 검둥이, 그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검둥아!” 하고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어디 갔을까. 초조하게 형에게 물으니, 그는 말없이 부엌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가마솥에선 펄펄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음속에 검은 예감이 스며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차마 솥뚜껑을 열 수 없었다. 두려움이 현실이 될까 봐,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매정하게 말씀하셨다.
“작은형 약이여, 이놈아.”
늑막염을 앓고 있던 형. 그를 위해 검둥이를…
얼마 전 아버지가 검둥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셨던 말이 떠올랐다.
“말복날까진 잘 커야지.”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저 장난처럼 들렸다. 하지만 말복날이 된 그날, 나는 어린 마음으로 잔인한 진실을 마주했다.
검둥이는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친구였고, 놀이터였고, 위로였고, 가족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던, 온몸으로 나를 안아주던 존재. 그 녀석과 함께 뒹굴며 깔깔 웃던 여름날들이 아련하게 되살아났다.
그날 이후, 나는 모두가 미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심지어 병든 형도. 그 누구도 검둥이를 지켜주지 않았다. 나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눈을 감아도 검둥이의 눈망울이 떠올라, 그 따뜻한 체온이 생각나, 분노와 슬픔이 뒤엉켰다.
그 후로 매년 말복만 되면 검둥이가 떠올랐다. 삶은 고기가 오르는 상을 마주하면, 나는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곤 했다. 검둥이의 희생 앞에서 식욕은 죄책감이 되었다.
지금도 말복이 되면 나는 어릴 적 그 여름날로 돌아간다. 검둥이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내 기억 속 그 녀석은 언제나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그렇게 검둥이는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늦은 반성처럼 중얼거린다.
“검둥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