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계
어느 날, 친구들이 모였다. 술 한 잔에 웃음이 무르익을 즈음, 누군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나이 더 들기 전에,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 한 번 가자.”
순간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그 자리에서 12개월 만기의 ‘여행계’가 탄생했다.
매달 정기 모임마다 총무가 전해주는 곗돈 보고는 기분 좋은 설렘의 증거였다. 쌓여가는 돈만큼이나 기대도 부풀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 후면 계가 끝나는 시점이 다가왔다.
회장이 모임에서 말했다.
“다음 달이면 돈이 다 모입니다. 그동안 제가 알아본 여행지와 계절, 기간을 설명드릴게요. 다음 달에는 각자 의견을 모아 여행 계획을 확정합시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마침내 마지막 곗돈까지 납부되고, 통장 속 금액이 목표치에 닿았다.
이제 비행기 표만 끊으면 되는 상황, 모두가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달 모임에서 터졌다.
의견을 모으는 자리에서, 각자 자기주장을 펼쳐냈다.
“난 그곳은 마음에 안 들어.”
“난 날짜가 너무 길어.”
“그 계절은 싫어.”
“마누라가 이미 다녀온 곳이야.”
“아들 얘기 들어보니 별로래.”
“내년엔 손자가 태어나서 못 가.”
이유는 각양각색이었고, 대화는 점점 토론이 아니라 설전이 되어갔다.
회장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처음 여행계를 만들 땐 한마음이던 사람들이, 막상 돈이 모이자 저마다의 사정을 앞세우고 있었다.
회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부터 날짜, 장소, 기간을 못 박고, 불참 시엔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어야 했습니다. 그걸 안 한 게 내 실수네요.”
토론은 길어졌지만, 양보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고집 속에서, 한때의 열정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결국 회장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오늘부로 여행계는 무효입니다. 모인 곗돈은 각자 통장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친목을 위한 모임도 여기서 끝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속엔, 실망과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꿈에 부풀었던 해외여행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만약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조금만 배려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함께 찍은 여행 사진을 보며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의 친목계는 되돌릴 수 없는 길로 흘러가 버렸다.
남은 건 텅 빈 마음과, 부질없이 무거워진 이야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