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을 오르다

설악 회상

by 비움과 채움

예전엔 그랬다.

배낭엔 텐트를 짊어지고,

석유버너와 코펠을 챙기고,

먹거리를 바라바리 싸 들고 설악을 올랐다.


정상 바로 아래엔 적십자 대피소가 있었다.

그곳은 날씨가 갑자기 궂어질 때

오직 하나뿐인 피난처였다.

대피소 주변엔 저마다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을 짓고,

꽁치 통조림으로 찌개를 끓였다.

그 향에 산신령도 침을 삼켰을 거다.


그때는 동작이 느린 사람이

곧 배를 곯는 시대였다.

순식간에 식사 시간은 끝났고,

남는 밥은 없었다.

산에서의 질서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화채능선은 지금은 비탐방로지만

그 시절엔 주등산로였다

천불동을 내려다보며 걷는 그 길 위에서

나는 마치 신선이 된 것만 같았다.

심장이 뛰고

전율이 흐르던 그 순간들을

나는 ‘마운틴 오르가슴’이라 불렀다.


흑백필름이 장전된 카메라 셔터는 멈춘줄 몰랐고

"야호!"를 외치던 내 메아리는

설악의 능선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돌아보면,

그 시절은 혈기 왕성한 20대였다

산이 그냥 좋았다

오르면 행복했고

내려가기 싫을 만큼 산이 좋았다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걸었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올랐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 시절의 나는 제대로 역마살이 끼었던 것 같다고.

그리고 지금도

그 역마살은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은 듯하다.


오늘도 설악을 누빈다

숨은 가쁘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설악에 중독된 나를 보며

웃는다.


산이 주는 위로와 자유

그리고 끝없는 유혹

나는 여전히

그 설악의 기별에 응답하며

제대로 홀려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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