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살아계시던 주희 초등학생 때만 해도 명절 차례상 앞에는 오로지 손자들만 설 수 있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손녀들은 죄다 주방에 조용히 모여 앉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큰집에 모이는 일도 없고 그 덕에 어머니가 손윗동서들 등쌀에도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명절이나 제사만이 아니었다.
삼시 세끼 밥은 무조건 따끈따끈하게 갓 지은 밥을 먹어야 하고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에는 좀처럼 젓가락이 닿질 않고 말 한마디를 하셔도 고압적으로, 남에 대한 지적을 숨 쉬듯이 하시는 어머니의 남편, 주희의 아버지.
주희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하셨을 때 말고는 자식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이 좀처럼 없으셨지만 자식들이 장성해서 독립하고 나니 옆에 있는 배우자를 향한 횡포가 날로 심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집에는 거의 안 계셨지만 주희라고 아버지의 가시 돋친 말로 인한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아버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무심코
나는 이다음에 커서 현모양처가 될 거야.
주희가 뜻한 바는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명한 엄마', '좋은 아내'가 되겠다는 것. 하지만 주희가 입을 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의 비아냥이 날아들었다.
"흥! 네가 무슨... 잘도 하겠다~"
순간 주희는 자신이 뭘 들은 건가 너무 놀라서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주희의 아버지는 예상대로 옛 기억이 전혀 없으시다. 주희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 대한 기억이라곤 이렇듯 급소를 공격당한 그 당시의 충격이 주를 이뤘다.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주희의 어머니의 경우 소식을 주고받는 형제자매도 없고 답답한 속을 어린 주희한테 토로하기 바빴다.
"그래도 아빠는 욱해서 막말을 하시긴 했어도 손찌검 같은 건 안 하시잖아요. "
엄마의 하소연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주희는 어떻게든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에게 서툰 위로랍시고 건넨 말은 피하고픈 불편한 진실을 더 끌어내고야 말았다. 신혼 초에 엄마 얼굴에 손을 대신 적이 있다니... 젊은 날에 저지른 딱 한 번의 실수라고는 하지만 주희는 깊은 상심에 빠지고 말았다.
주희는 이런 연유로 사람들의 말에 아주 민감했다. 일단 비난부터 하고 상대를 얕잡아보는 말투로 인한 상처가 있었기에 적어도 연인이나 배우자 감을 선택함에 있어 인품을 대변하는 말투, 평소 습관을 가장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주희와 만나는 남자들은 이런 속내를 간파하기라도 한듯 처음에는 경청에 한껏 충실하고 따스한 말로 위로해 주는 재주를 선보였지만 아쉽게도 그 연기 아닌 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오랜만에 만났더니 소말리아 기아 난민이냐며 징그럽다고 저리 가라고 하질 않나,
툭 하면 사람이 왜 이리 피곤해보이냐며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질 않나,
하도 번번이 약속을 어겨서 투정을 좀 부렸기로서니 너는 몸만 어른일 뿐 인격이 덜 자랐다며 인신공격을 해대질 않나...
주희는 매섭게 받아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 말들을 주워 삼키기 바빴다. 하지만 소화시키지 않고 꿀꺽 삼켜버린 말들은 부표처럼 두둥실 의식 위로 이내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아물지 않은 딱지를 떼어내는 듯한 통증을 반복해서 느껴야만 했다.
주희는 너무 궁금해졌다. 램프의 요정 지니를 깨우는 심정으로 전생 극장이 상영되길 고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전생 상영관을 다시 찾아주신
주희 님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궁금해했던
발자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7세기 조선 한양으로 갑니다.
17세기 한양 외곽에서 '만상'이라는 거대한 상단을 이끌던 유 씨 마님은 뛰어난 수완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품이 극도로 독선적이고 냉정했습니다. 그녀는 오직 상단의 이익과 자신의 명예만을 목표로 했으며, 상단 내 모든 사람을 기계의 부품처럼 대했습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스스로 권력을 쥐었기에 주변의 조언을 무시하고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상단을 운영했습니다. 특히, 박 서기에게는 밤낮없이 고된 업무를 지시하고 작은 실수에도 인간적인 모욕을 주고 그가 가족에게 보내는 쌀까지 늦게 지급하며 자비심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생의 남편에게 당하는 고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박 서기는 유 씨 마님 밑에서 상단의 모든 회계를 처리하는 실무자였습니다. 그는 유 씨 마님의 독선적인 성격을 알면서도,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주변의 인정과 상단의 안정적인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관계를 끊지 못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유 씨 마님에게 착취당하고 고통받았지만 스스로 무기력함을 택하며 굴종하는 관계에 집착했습니다. 더 나아가, 유 씨 마님의 비인간적인 명령(채무자에게 가혹한 이자를 부과하는 등)을 집행하며 업(카르마)을 공유했습니다. 이는 현생에서 거친 남자들과의 인연이 닿고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집착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전생의 지배자(유 씨 마님)는 현생의 모친으로 굴종자(박 서기)는 현생의 딸로 태어나 역할의 뒤바뀜과 고통의 공유를 통해 업장을 해소합니다.
전생에 유 씨 마님이 행사했던 독선적인 지배와 무자비한 억압의 카르마는 현생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을 통해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그녀는 전생에 자신이 주었던 것과 같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남편에게서 받으며, 억압당하는 역할을 경험합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이 힘든 상황은 전생에 타인의 고통을 외면했던 업에 대한 정화 과정입니다.
주희 님의 과보는 나쁜 남자 친구입니다.
전생에 박 서기가 유 씨 마님의 독선에 굴종하며 자기 파괴적인 관계에 집착했던 카르마가 현생에서 반복됩니다. 그녀는 성격이 거친 남자와 계속 인연이 닿으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전생의 굴종 역할을 반복합니다. 이는 억압적인 관계에 대한 전생의 집착과 해결되지 않은 카르마를 해소하려는 윤회의 시도입니다.
동병상련의 모녀 관계를 형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전생에 '지배와 복종'이라는 고통스러운 관계를 공유했습니다. 현생에서 모녀로 만나, 어머니는 남편에게, 딸은 남자 친구에게 똑같이 독선적 남성이라는 형태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동병상련'은 서로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연결고리가 되며, 이는 곧 업을 함께 풀어야 할 숙명임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 현생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는 '자비와 용기'입니다.
주희 님의 어머니는 전생의 권위를 내려놓고, 남편의 독선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자비심을 배우며, 굴종 대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주희 님은 전생의 굴종적인 습관을 끊고 자신을 해치는 관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수행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궁금증이 다 해결되셨나요?
다음에 또 다른 상영관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 세상에 일방적인 가해자, 일방적인 피해자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줄곧 해왔지만 주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구슬들이 한 번에 꿰어진 것만 같은 시원함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아닌 건 아니라고 자기 표현을 하기 힘들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끌려다는 것까지 모든 건 자기 안의 집착 때문이었음을 시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주희는 이전에는 경험한 적 없는 희망찬 용기가 가슴 속에서 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